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49일간의 추격전으로 이어지다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 해안. 평화롭던 동해 바닷가에 좌초된 북한 상어급 잠수함 한 척이 발견됐다. 택시 기사와 초병의 동시 신고로 시작된 이 사건은 단순한 해상 사고가 아닌, 대한민국 전역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서막이었다.
이 사건은 북한이 1년 넘게 치밀하게 준비해 온 정찰 도발 패턴의 정점이었으며, 이후 49일간 대한민국 국군과 예비군이 총동원된 대규모 추격전으로 전개됐다.

김정일 체제 안정화 위한 1년 넘는 사전 정찰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의 통치 기반이 불안정했던 시기, 북한은 내부 위기를 해소하고 군부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대남 적대적 군사 행동을 강화했다. 특히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북한은 동해 NLL 북방 한계선과 강릉·삼척 해안선에 대한 저강도 군사 도발 및 정찰 활동을 지속했다.
우리 군 정보 기관은 북한 반잠수정의 야간 침투 시도와 강릉, 삼척, 묵호 등 특정 해안선에 대한 사전 정찰 패턴이 급증했음을 포착했다. 이는 북한이 침투 루트를 스캐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AN-2기 등을 동원해 해안도로를 촬영한 고배율 렌즈 필름 잔여물이 발견되는 등, 북한이 치밀하게 작전을 준비해 왔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만우절의 기원: 새해 변경의 역사적 아이러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달력 개혁, 만우절을 탄생시키다
꽁치 그물에 걸린 북 잠수함과 비전투원 11명의 처형
사건 당일인 9월 17일 밤, 3인의 정찰조를 회수하기 위해 해안에 바짝 붙었던 상어급 잠수함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좌초된 것이다. 잠수함 내부에서는 해상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민감한 장비와 문서를 소각한 뒤 전원 육상 탈출을 결정했다. 당시 잠수함에는 승조원, 안내조, 정찰조 등 총 26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들은 청학산 일대로 이동한 뒤, 전투 능력이 없는 승조원 등 비전투원 11명을 조국을 위해 희생하라며 직결 처형하는 잔혹성을 보였다. 이는 전우의 시신까지 수습하는 우리 군의 문화와는 극명히 대비되는 공산권 특수부대의 비인도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9월 18일 오후 4시 40분경, 강릉시 강동면 일대에서 수상한 인물로 지목된 잠수함 조타수 이광수 상위가 경찰 두 명에게 체포됐다. 이광수 상위는 신문 과정에서 26명의 침투 사실과 비전투원 11명의 처형 장소를 상세히 진술했다. 군은 그의 진술을 토대로 청학산 일대에서 11구의 시신을 발견했고, 이들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처형됐음을 확인했다. 이로써 단순 사고가 아닌 계획된 무장공비 침투 사건임이 명백해졌다.

진돗개 하나 발령과 49일간의 추격전 총력전
사건이 계획된 침투로 확인되자, 군은 즉각 최고 경계 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작전 명령을 대관첩 추적 선멸 작전으로 전환했다. 육군 제1군사령부 예하 28개 부대와 해군, 공군 전력이 동원됐으며, 특히 여섯 개 시 7개 군에서 소집된 예비군만 4만 5천 명에 달했다. 하루 평균 약 4만의 병력이 투입되는 총력전이 전개됐다.
9월 19일부터 22일까지 첫 일주일간 가장 치열한 산악 추격전이 벌어졌다. 육군 특수부대와 특전사에 의해 무장공비 9명이 사살됐다. 북한 공작조는 밤에만 이동하고 급경사 산악 계곡에 은신하는 게릴라 전술을 펼쳤으며, 심지어 한국군 군복을 탈취해 위장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군 역시 산악 추락, 오인 사격, 공비 급습 등으로 전사 12명을 포함해 총 17명의 희생이 발생했다.
군은 수색선을 촘촘히 짜는 ‘빗질 작전’을 통해 집요하게 잔당을 추적했다. 9월 28일과 30일 추가로 2명을 사살했고, 두 달 가까이 이어진 추격전의 마지막 교전은 11월 5일 강원도 인제 북면 연화동 계곡에서 발생했다. 이날 새벽 유권 특전사 및 정보 부대의 격렬한 교전 끝에 2명을 사살함으로써, 총 13명 사살, 1명 생포(이광수 상위), 1명 실종 상태로 49일간의 작전이 공식 종료됐다.
사건 이후: 대한민국 안보 태세의 전면 혁신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안보 태세 전반에 걸친 혁신을 가져왔다. 잠수함이 해안 50m 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탐지하지 못한 초기 대응의 혼선과 야간 장비의 부족 문제 등 군의 취약점이 노출됐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동해안 경계 태세가 대폭 강화됐으며, 야간 감시 장비, 특히 열영상 장비(TOD)가 전방위적으로 보강됐다. 또한 대침투 작전 교리와 훈련이 전면 재검토 및 강화됐고, 군은 실전과 같은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대비 태세를 끌어올렸다. 이 사건은 군 복무 중인 장병뿐 아니라 예비군에게도 실전 경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국제적으로도 파장이 컸다. 10월 15일 UN 안보리는 북한의 잠수함 침투를 공식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중국까지 이에 동참했다. 북한은 처음에는 엔진 고장으로 표류했다고 주장했으나, 증거가 명백해지자 12월 29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이례적으로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우리 정부는 이를 사과에 준하는 유감으로 평가하고, 다음날 북한 공작원 24명의 유해를 송환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대한민국이 평화 시기에도 적의 도발에 철저히 대비해야 함을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다. 현재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감시 자산이 발전하여 잠수함 침투 자체가 어려워졌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지만, 희생된 장병과 민간인의 넋은 대한민국 안보의 중요성을 영원히 상기시키고 있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기사
심사평가원 2년 연속 공공기관 종합청렴도 1등급 달성… ‘현장 참여 중심’ 청렴문화 정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