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비밀 로제타 스톤: 고대 이집트 문명을 부활시킨 위대한 열쇠
1799년 여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끈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원정하던 중, 나일강 삼각주 서쪽의 로제타(현재 라시드) 요새를 보강하던 병사들은 우연히 검은 현무암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이 평범해 보이는 돌덩이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언어학적 발견 중 하나인 ‘로제타 스톤’이었다.
이 석판에는 단 하나의 내용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히에로글리프), 이집트 민중문자(데모틱),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 세 가지 문자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당시 병사들은 그 중요성을 직감했지만, 이 돌의 운명은 곧 국제 정세의 격랑 속에 휘말리게 됐다.
프랑스군은 이집트에서 영국군과의 격렬한 전투 끝에 패배했고, 로제타 스톤은 영국군의 전리품이 되어 런던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전쟁의 전리품이 아니었다. 수천 년간 침묵했던 고대 이집트 문명의 언어를 해독하고 그 찬란한 역사를 세상에 다시 드러낼 결정적인 단서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학자들은 이집트 상형문자를 단순한 그림이나 상징으로만 여겼고, 체계적인 문자 체계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기까지는 수십 년간의 치열한 학술적 도전과 좌절이 이어졌다. 과연 이 수수께끼의 석판은 어떻게 고대 이집트 문명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었을까? 로제타 스톤 발견의 숨겨진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본다.

운명의 발견과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
1799년 7월 15일, 프랑스군 공병 피에르-프랑수아 부샤르 대위가 나일강 삼각주 서쪽의 로제타 인근에서 요새 보강 작업을 감독하던 중, 병사들이 땅속에서 돌연 검은 현무암 덩어리를 발견했다. 이는 기원전 196년에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내용이 담긴 석비의 일부였다.
프랑스 학자들은 즉시 이 석판이 세 가지 다른 문자로 동일한 내용이 기록됐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 잠재적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집트에서 프랑스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던 나폴레옹은 학문적 성과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이 석판은 곧 카이로로 이송되어 연구가 시작됐다.
그러나 로제타 스톤의 운명은 프랑스군의 손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1801년, 프랑스군은 영국군과의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패전의 결과로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퇴각하게 됐고, ‘알렉산드리아 양도 협정’에 따라 로제타 스톤을 포함한 수많은 고대 유물들이 영국군의 전리품으로 넘어가게 됐다.
1802년, 이 위대한 석판은 런던에 도착했고, 대영박물관에 소장되면서 전 세계 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 문명의 열쇠가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주인을 바꾸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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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형문자 해독의 서막: 토마스 영과 샹폴리옹의 영광
로제타 스톤이 대영박물관에 안착하자, 유럽 전역의 언어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특히, 그동안 상형문자가 단순한 그림 부호이거나 상징적인 표현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오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로 인해 수천 년간 이집트의 방대한 기록들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이 해독의 퍼즐에 처음으로 중요한 조각을 맞춘 인물은 영국의 박식한 학자 토마스 영이었다. 그는 로제타 스톤의 민중문자와 고대 그리스어 부분을 비교하며 일부 상형문자가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을 해독하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이는 상형문자 해독의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돌파구는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에 의해 이루어졌다. 샹폴리옹은 어릴 적부터 고대 언어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으며, 코트니 부인의 편지를 통해 로제타 스톤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평생을 상형문자 해독에 바쳤다.
그는 상형문자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혼합된 체계라는 혁명적인 가설을 세웠고, 토마스 영의 연구를 바탕으로 다른 비석인 필레 오벨리스크에서 발견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을 로제타 스톤의 프톨레마이오스 이름과 비교하며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특히, 왕의 이름이 타원형 테두리(카르투슈) 안에 새겨져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각 상형문자가 어떤 소리를 나타내는지 체계적으로 밝혀냈다. 1822년 9월 27일, 샹폴리옹은 파리 학사원에 상형문자 해독의 성과를 담은 역사적인 서신을 발표했고, 이는 고대 이집트 문명 연구의 새 시대를 열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부활과 현재의 로제타 스톤
샹폴리옹의 로제타 스톤 해독은 단순한 언어 퍼즐 풀이를 넘어선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의 해독으로 피라미드 내부의 벽화, 파피루스에 기록된 방대한 문헌, 무덤 속 비문 등 수천 년간 침묵했던 고대 이집트의 모든 기록들이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냈다. 이는 고고학, 역사학, 종교학 등 인류 문명 연구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는 이제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 신앙, 통치 방식, 그리고 그들의 복잡한 사회 구조를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로제타 스톤은 잊혀진 문명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 문자 그대로 ‘시간의 문’을 열어준 열쇠가 됐다.
오늘날 로제타 스톤은 런던 대영박물관의 이집트 전시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장품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매년 수백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러나 로제타 스톤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집트 정부는 물론, 일부 학자와 시민단체들은 로제타 스톤이 이집트로 반환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유물 반환 문제를 넘어,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과 문화재의 보편적 접근성이라는 복합적인 질문을 던진다. 로제타 스톤은 이제 단순히 고대 언어의 열쇠를 넘어, 인류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문화유산을 어떻게 소유하고 보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상징이 됐다.
로제타 스톤의 발견과 해독은 인류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 석판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우연히 발견됐고, 치열한 국제 정세와 학술적 경쟁 속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드러냈다. 특히 샹폴리옹의 천재적인 통찰력과 끈기 덕분에 고대 이집트의 신비로운 상형문자가 마침내 그 비밀을 벗을 수 있었다.
로제타 스톤은 단순히 언어를 해독하는 도구를 넘어, 수천 년간 잊혔던 문명의 목소리를 되찾아주고, 인류가 자신의 기원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 위대한 유산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 돌이 던지는 질문과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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