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시각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다.※AI 제작 이미지
눈먼 자들의 도시: 전염병이 드러낸 사회 시스템의 취약성과 인간성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역작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충격적인 소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원인 불명의 ‘하얀 실명’ 전염병은 마치 거대한 흰 안개처럼 도시를 집어삼키며 모든 것을 뒤바꿨다. 이 미지의 질병은 사람들의 시야를 온통 하얗게 만들어 버렸고, 급속도로 퍼져나가 사회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재앙으로 작용했다. 정부는 혼란을 막기 위해 맹인들을 폐쇄된 정신병원에 격리했으나, 이 과정에서 최소한의 지원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며 무장 군인들의 감시 아래 방치하는 비인간적인 선택을 했다.
격리된 수용소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기본적인 위생과 식량조차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고, 기존의 모든 질서와 도덕은 무너져 내렸다. 약탈과 폭력, 그리고 더욱 잔혹한 행위들이 만연하며 인간 사회의 밑바닥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이 절망적인 상황은 독자들에게 문명의 외피가 벗겨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야만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존재했다. 바로 실명한 남편을 지키기 위해 자신도 눈이 먼 척하며 수용소로 들어간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여인이다. 그녀의 눈은 수용소의 끔찍한 현실을 목격하는 유일한 창이자, 독자들에게 그 참혹함을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그녀는 주변의 추악한 행위들을 지켜보며 깊은 고뇌에 빠지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을 돕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연 이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그녀의 시선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하얀 실명의 전염병: 문명의 시작과 끝을 가르는 경계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평범한 시민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앞을 보지 못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으로 시작됐다. 이 ‘하얀 실명’은 단순한 시각 상실이 아닌, 세상의 모든 것을 하얗게 뒤덮는 전염병으로 묘사됐고, 이는 곧 사회 전체의 기능 마비로 이어졌다.
정부는 공포와 혼란을 통제하기 위해 실명 환자들을 격리했지만, 그들의 결정은 인도주의적 관점보다는 통제와 배제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부의 무책임함과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격리 시설은 사실상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고, 이곳은 문명의 잔재조차 찾아볼 수 없는 무법지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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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상실의 현장: 격리 수용소에서 벌어진 비극
버려진 정신병원에 격리된 맹인들은 지옥과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정부는 이들을 위한 식량이나 위생 관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무장 군인들은 그저 외부로의 탈출을 막는 역할만 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조차 박탈된 환경에서,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식량을 독점하려는 이들과 저항하는 이들 사이에서 폭력이 난무했고, 약탈과 강간 등 온갖 야만적인 행위가 일상처럼 벌어졌다. 소설은 이러한 참혹한 상황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쉽게 이기적인 존재로 변질될 수 있으며, 사회적 규범과 도덕이 무너졌을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될 수 있는지를 가차 없이 보여줬다. 이는 비단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붕괴 상황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현실적인 경고로 다가온다.

유일하게 눈을 뜬 자: 희망을 찾아 헤매는 고독한 시선
모든 이들이 눈이 멀어버린 암흑 속에서,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었던 한 여성은 극한의 고통과 책임감을 짊어졌다. 처음 실명한 남자의 아내였던 그녀는 남편의 곁을 지키기 위해 자신도 맹인인 척 수용소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은 수용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추악한 행위들을 목격하는 유일한 증인이 됐다.
그녀는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며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을 돕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오물을 치우고, 식량을 찾아 나누고, 폭력에 맞서는 그녀의 행동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희망이자 이성의 상징으로 작용했다. 그녀의 존재는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파괴되는 순간에도 연대와 공감을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음을 암시했다.
문명의 가면이 벗겨진 도시: 재건의 가능성과 깊은 성찰
수용소의 상황이 극에 달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병원 밖으로 탈출했다. 그들이 마주한 외부 세계는 격리된 수용소와 다를 바 없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도시 전체가 무법천지가 됐고, 모든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채 사람들이 길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유일하게 눈을 뜬 여인은 자신이 이끄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식량을 찾아 헤매며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
이들의 여정은 문명이라는 껍데기가 벗겨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생존하며, 어떻게 다시 공동체를 형성하는지를 보여줬다. 소설은 결국 모든 이들의 눈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며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인간 사회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겼다. 눈을 뜬다 한들, 이미 목격한 인간 본성의 민낯과 붕괴된 사회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순히 시력을 잃는다는 물리적 실명을 넘어, 사회적 실명과 도덕적 실명에 대한 경고를 던진다. 이 작품은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리고 문명과 사회적 규범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의미와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의 눈이 진정으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통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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