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죽음을 부른 ‘동물 피를 사람에게 수혈’ 시도… 혈액형 발견 이전의 비극
1667년 프랑스 파리,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환자의 침상 곁에 의사 장-밥티스트 드니(Jean-Baptiste Denis)가 서 있었다. 그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새로운 의학적 시도, 즉 수혈을 감행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피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온순한 양의 피였다. 당시 의사들은 동물의 피가 인간의 ‘병든 피’를 정화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드니는 환자에게 양의 피를 성공적으로 주입했다고 기록했으나, 이어진 시도는 곧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환자들은 극심한 발열, 구토, 소변의 혈색 변화를 호소하며 고통스럽게 사망했다. 생명을 살리려던 시도가 오히려 죽음을 앞당기는 비극적인 역설이었다. 이는 인류가 혈액형의 존재를 알기 전, 과학적 무지 속에서 감행했던 가장 위험한 의료 행위 중 하나로 기록됐다.
이처럼 혈액형이 발견되기 전 수백 년 동안, 의학계는 피가 생명을 유지하는 핵심 물질임을 알았지만, 그 피가 가진 치명적인 면역학적 비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양, 송아지 등 다른 종의 피를 인간에게 주입하는 ‘이종 수혈(Xenotransfusion)’은 절망적인 환자에게 마지막 희망이었으나, 대부분 면역 반응으로 인한 쇼크와 용혈 현상을 일으키며 비극으로 끝났다.

절망 속에서 시작된 ‘피의 연금술’: 17세기 수혈의 서막
수혈의 개념은 고대부터 존재했지만, 실제로 혈관과 혈관을 연결하는 시도가 가능해진 것은 17세기 후반, 해부학적 지식과 외과 기술이 발전하면서부터였다. 특히 1660년대 유럽에서는 윌리엄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이 정립되면서 피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사람들은 피를 단순한 액체가 아닌, 생명력 그 자체로 여겼다. 병든 사람에게 건강한 피를 주입하면 병이 낫고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일종의 ‘피의 연금술’ 신봉이 팽배했다.
초기 수혈 시도는 주로 동물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나, 곧 인간에게 적용됐다. 1667년, 영국의 리처드 로어(Richard Lower)와 프랑스의 장-밥티스트 드니가 대표적인 선구자였다. 드니는 특히 양의 피를 사용했는데, 양이 온순하고 피가 깨끗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들은 수혈 직후 환자가 일시적으로 활력을 되찾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고무됐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곧이어 발생하는 면역 반응은 치명적이었다. 환자의 몸은 외부에서 들어온 동물 피의 적혈구를 이물질로 인식하고 격렬하게 파괴하기 시작했다.
양의 피, 치명적인 독이 되다: 이종 수혈의 비극적 결과
‘동물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는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면역학적 불일치에 있다. 인간의 면역 체계는 다른 종의 혈액 내에 존재하는 항원(Antigen)을 강력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특히 포유류의 적혈구 표면에는 수많은 단백질과 당 복합체가 존재하며, 이는 인간의 항체와 결합하여 즉각적인 용혈 반응(Hemolysis)을 일으킨다. 용혈 반응은 적혈구가 파괴되면서 헤모글로빈이 방출되고, 이는 신부전, 쇼크, 그리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과정이다.
드니의 환자 중 일부가 사망하자, 프랑스 의회는 1670년 수혈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영국과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유사한 금지령을 발표하거나, 의사들이 스스로 위험성을 인지하고 수혈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수혈은 의학계에서 거의 200년 가까이 잊힌 기술로 남게 됐다. 이 시기는 과학적 근거 없이 희망에만 의존했던 의학적 시도가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가 됐다.

200년간의 침묵과 동종 수혈의 재개: 인간의 피로의 전환
이종 수혈이 금지된 후, 수혈 연구는 긴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영국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블런델(James Blundell)이 다시 수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출산 후 출혈로 사망하는 산모들을 보며, 동물의 피가 아닌 ‘인간의 피’를 사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블런델은 1818년부터 1829년 사이에 인간 대 인간 수혈을 여러 차례 시도했고, 일부 환자를 살리는 데 성공했다. 이는 수혈의 가능성을 다시 열었지만, 여전히 성공률은 낮았고, 수혈 부작용의 원인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어떤 환자는 살고, 어떤 환자는 죽는 이유를 설명할 과학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런델의 시도는 이종 수혈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들은 수혈을 도박처럼 여겼다. 성공과 실패의 확률이 반반인 이 위험한 시술은, 과학적 원리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보편적인 치료법으로 자리 잡을 수 없었다.
구세주의 등장: 카를 란트슈타이너의 혈액형 발견이 낳은 혁명
수혈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1900년에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는 건강한 사람들의 혈액 샘플을 섞어 실험하던 중, 특정 혈액끼리 섞이면 응집(Clumping)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응집 현상이 혈액 내 존재하는 특정 항원과 항체의 반응 때문임을 밝혀냈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혈액을 A, B, C(후에 O로 명명),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이듬해에는 AB형이 발견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ABO 혈액형 시스템이 완성됐다.
란트슈타이너의 발견은 수혈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과학적 토대가 됐다. 비로소 의사들은 수혈 전에 환자와 공혈자의 혈액형을 확인하고, 호환되는 혈액만을 주입할 수 있게 됐다. 이 발견은 더 이상 ‘동물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는 위험한 시도를 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으며, 수혈을 도박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표준 의료 행위로 격상시켰다. 란트슈타이너는 이 공로로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인류를 구한 지식의 힘: 현대 수혈 안전성 확보
혈액형 발견은 단순한 분류에 그치지 않고, 면역학이라는 새로운 의학 분야의 문을 열었다. 란트슈타이너의 업적 이후, Rh 인자 등 다른 중요한 혈액형 시스템이 추가로 발견됐고, 혈액 보존 기술과 교차 반응 검사(Cross-matching) 기술이 발전하면서 수혈은 현대 의학에서 가장 안전하고 필수적인 치료법 중 하나가 됐다.
17세기, 절박한 상황에서 양의 피에 의존했던 비극적인 역사는 과학적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가르쳐준다. 당시 의사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면역학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이종 수혈은 재앙이었다. 오늘날 수혈은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기적이 됐으며, 이는 미지의 영역에 도전했던 과거의 실패와, 그 실패를 교훈 삼아 진실을 찾아낸 과학자들의 끈기 있는 탐구 덕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