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러일전쟁서 탄생한 러시아 정벌 의미 담긴 정로환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 파병된 일본군이 원인 모를 설사병으로 대거 사망하면서 탄생한 ‘정로환’이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배탈 치료제로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제국주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약의 탄생 배경과 함께 주성분인 크레오소트의 발암 위험성에 대한 논란도 있다. 명치천황의 칙령으로 개발된 이 군용 설사약이 어떻게 한국 가정의 상비약이 되었을까?

만주 파병 일본군 집단 사망사건이 부른 천황의 긴급 명령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전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에서 평소 건강하던 병사들이 특별한 질병 없이 연이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 지휘부의 면밀한 조사 결과 그 주범은 바로 현지 수질로 인한 설사였다. 만주의 나쁜 물로 인해 발생한 물갈이 현상이 일본군의 전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명치천황은 즉시 칙령을 내려 배탈과 설사에 효과적인 약을 개발하라고 명령했다. 전국의 제약회사들이 수천 가지의 처방을 만들어 제출했고, 그 중 다이코신약에서 개발한 모쿠크레오소트 제제가 가장 뛰어난 효과를 보였다. 이 약을 복용한 일본군이 설사병을 극복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정복할 정(征)’, ‘러시아 로(露)’, ‘둥근 환(丸)’을 합쳐 ‘정로환(征露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땅에 전해진 제국주의 상징약, 1907년부터 사용 기록 발견
정로환이 조선에 전해진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07년 7월 15일 황성신문에 정로환 관련 사건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군복을 입고 가짜 정로환을 판매하던 사기범 이야기가 등장하며, 당시 신문 광고에서 유사품 주의 문구가 자주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일본의 군국주의 선전도구로도 활용됐다. 광고에서는 ‘육해군어용약’이라며 황군 위문품의 최적 약품이라고 선전했고, 심지어 상품명을 ‘전몰기념환’으로 바꾼 적도 있었다. 현재도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정로환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차 대전 후 ‘정복’에서 ‘바른’으로, 하지만 본질은 그대로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일본 정부는 ‘국제적 신의상’이라는 이유로 정복할 정(征)자를 바를 정(正)자로 바꿔 정로환(正露丸)으로 표기하도록 전국 제약회사에 명령했다. 하지만 러시아를 뜻하는 ‘로(露)’자는 그대로 유지되어 여전히 제국주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05년 러일전쟁 100주년 기념식에서 나카소네 전 총리가 “러일전쟁은 아시아 민족에게 우리도 백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고 연설할 때도 정로환이 진열품 중 하나로 전시되었다. 이는 일본이 여전히 과거 군국주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되고 있다.
한국 정로환의 독립, 1973년 동성제약 기술 도입으로 시작
해방 후 한국에서는 정로환을 계속 일본에서 수입해서 사용해야 했다. 국내 생산이 시작된 것은 1973년부터다. 동성제약 창업주인 고 이선규 회장이 다이쿄제약에서 퇴직한 전 공장장을 삼고초려 끝에 만나 제조 기술을 전수받아 자체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일본이 정로환 제조기술 유출을 철저히 차단하던 시기였던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이후 정로환은 방부살균 작용과 위장 기능 촉진 효과가 있는 여러 생약제를 배합한 제제로 배탈, 복통, 설사 치료에 높은 효과를 보이며 한국 가정의 필수 상비약으로 자리잡았다. 특유의 냄새를 제거한 당의정 형태도 개발되어 복용 편의성도 크게 개선되었다.

발암물질 크레졸 함유로 안전성 논란 가중
하지만 최근 정로환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로환의 주성분인 크레오소트가 문제의 핵심이다. 목타르를 증류하여 만든 크레오소트에는 페놀, 크레졸 등 다양한 방향족 화합물이 함유되어 있는데, 특히 크레졸은 암을 유발하는 독성물질로 분류되어 있다.
나무의 방부제나 살충제로 주로 사용되는 크레오소트가 의약품으로 사용되면서, 판매되고 있어 소비자들의 불안이 가중되고, 의료진들 사이에서도 정로환의 필요성과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크레졸 성분을 뺀 정로환F를 생산하고 있으나, 크레졸의 유해성이 학술적으로 완전히 입증되지는 않아 일본에서는 지금도 오리지널 정로환이 나오고 있다.
역사와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정로환의 미래
정로환은 단순한 의약품이 아닌 동북아 격변기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적 산물이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탄생해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가, 해방 후에는 한국인의 생활 속 깊숙이 자리잡은 복잡한 궤적을 보여준다.
현재 시중에는 한글로 표기된 ‘정로환’과 한자로 ‘정로환(正露丸)’을 쓰는 두 가지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친숙한 약 이름이지만 그 유래와 역사적 배경을 알고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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