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기행”, 그 비극적 종말과 역사의 교훈
로마 제국의 3대 황제,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우리에게는 ‘칼리굴라(Caligula)’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인물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폭군 중 한 명으로 기록된다. 그의 통치 기간은 불과 4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기행과 잔혹 행위의 흔적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선명하다. 수많은 기행 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자신의 애마(愛馬)를 집정관(Consul)으로 임명하려 했다”는 충격적인 기록이다. 이 일화는 단순한 광기 어린 황제의 해프닝을 넘어, 당대 로마 사회의 모순과 절대 권력의 위험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역사는 종종 한 인물의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그 시대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낸다. 칼리굴라의 애마 집정관 임명 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단순한 괴짜 황제의 변덕이 아니라, 로마의 공화정 전통을 상징하는 최고위직인 집정관과 그 직위를 배출하는 원로원 전체를 향한 치밀하게 계산된 모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 기사는 이 하나의 기록을 실마리 삼아, 칼리굴라라는 인물과 그가 통치했던 시대의 광기,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정치적 함의를 깊이 있게 추적한다.

신격화된 폭군, ‘작은 장화’의 등장
칼리굴라, 즉 ‘작은 장화’라는 별명은 그가 어린 시절 군단 병사들의 마스코트처럼 지내며 신었던 작은 군화(칼리가)에서 유래했다. 그는 로마 최고의 명문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적통이었으며, 위대한 장군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자 국부(國父)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였다. 선제(先帝) 티베리우스의 폭압적인 통치 말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젊고 활기찬 칼리굴라의 즉위를 열렬히 환영했다.
초기 칼리굴라의 통치는 제국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듯 보였다. 그는 사면령을 내리고, 부당한 세금을 폐지하며, 검투사 경기를 성대하게 개최하는 등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즉위 7개월 만에 심각한 병을 앓고 난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역사가들은 이 질병이 그의 정신 상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한다.
병마에서 회복된 칼리굴라는 자신을 ‘살아있는 신’으로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를 유피테르(제우스)와 동일시했으며, 로마 시내에 자신의 신전을 짓고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도록 강요했다. 여동생들과의 근친상간 의혹, 정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재산 몰수, 그리고 국가 재정을 파탄 낼 정도의 사치스러운 연회와 건설 사업이 이어졌다. 그의 ‘기행’은 점차 예측 불가능한 광기와 잔혹성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로마 사회는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1816년은 여름이 없었던 해다. 북반구 평균 기온 0.7°C 하락이 불러온 대기근의 충격적 기록
애마 ‘인키타투스’, 황제의 동반자
칼리굴라의 광기를 상징하는 정점에는 그의 애마 ‘인키타투스(Incitatus)’가 자리하고 있다. 인키타투스는 ‘빠른 질주’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산 경주마였다. 칼리굴라는 이 말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다 못해 집착에 가까운 수준을 보였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인키타투스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었다. 이 말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마구간, 상아로 만든 구유, 보라색 최고급 천으로 만든 담요를 제공받았다. 또한 18명에 달하는 하인이 인키타투스만을 위해 봉사했으며, 황금 술잔에 포도주를 받아 마시고 황제와 동석하여 식사하는 호사를 누렸다. 심지어 칼리굴라는 인키타투스의 이름으로 손님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이러한 사치는 단순한 동물 애호를 넘어선다. 황제는 경주 전날 밤, 인키타투스의 안정을 위해 주변 지역에 ‘숙정(肅靜)’ 명령을 내렸으며,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 말은 단순한 황제의 애마가 아니라, 황제의 권위를 대변하는 또 다른 상징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존재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였다.

집정관 임명 시도, 원로원을 향한 경멸
이 모든 기행의 절정은 인키타투스를 로마의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Consul)’으로 임명하려 한 시도였다. 집정관은 본래 로마 공화정 시대의 최고 통치자였으며, 제정 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로마 최고의 명예직으로 원로원 의원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자리로 여겨졌다.
칼리굴라가 진심으로 말을 집정관에 임명하려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그러한 의도를 비추며 원로원을 조롱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고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칼리굴라가 원로원을 얼마나 경멸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제시한다.
당시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하에 있었다. 이는 황제가 ‘제1시민(프린켑스)’으로서 원로원과 권력을 분점하는 형태를 띠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황제의 1인 독재가 강화되는 과정이었다. 칼리굴라는 이 위선적인 정치 체제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가 인키타투스를 집정관 후보로 거론한 행위는 “당신들, 로마 최고의 귀족이라는 원로원 의원들이 하는 일이 내 말(馬)이 하는 일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혹은 “내가 원한다면, 이 짐승조차 당신들의 최고위직에 앉힐 수 있다”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였다. 이는 원로원의 권위와 공화정의 전통을 발밑에 짓밟는 행위이자, 황제의 권력이 모든 규범과 상식 위에 군림한다는 선언이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굴욕감에 치를 떨었지만, 신격화된 폭군의 서슬 퍼런 위협 앞에서 그 누구도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광기의 정치, 그 필연적 결말
말(馬)을 집정관으로 만들려던 시도는 칼리굴라가 벌인 수많은 기행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제우스 신전의 신상 머리를 자신의 두상으로 교체하려 시도했으며, 바다의 신 넵툰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병사들에게 창을 던지게 하거나 ‘바다의 전리품’이라며 조개껍데기를 줍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광기 어린 통치는 무의미한 잔혹 행위와 재정 낭비로 이어졌고, 로마 사회의 근간을 흔들었다. 황제에 대한 경외심은 공포와 혐오로 바뀌었다. 결국, 더 이상 그의 폭정을 견딜 수 없었던 이들이 칼을 들었다. AD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는 자신이 가장 신임했던 근위대(Praetorian Guard) 장교 카시우스 카이레아를 비롯한 이들의 손에 암살당했다. 그의 아내와 어린 딸 역시 무참히 살해당하며, 4년간의 광기 어린 통치는 막을 내렸다.
칼리굴라의 죽음 이후, 원로원은 그의 모든 기록을 말살하려는 ‘기록 말살형(Damnatio Memoriae)’을 시도했으나, 역사는 그의 기행을 잊지 않았다. 특히 애마 인키타투스를 집정관으로 만들려 했던 일화는, 절대 권력이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킬 때 한 사회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는 2천 년 전 로마의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의 속성을 꿰뚫는 보편적인 역사의 교훈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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