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세기 북미 대륙, 흔적만 남은 로어노크 식민지의 버려진 모습.
로어노크 식민지 증발 사건: 400년 넘는 의문의 진실은?
16세기 말, 북미 신대륙에 영국인들이 세운 최초의 영구 정착지를 목표로 했던 로어노크 식민지에서 역사상 전례 없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1587년, 존 화이트 총독이 이끈 115명의 식민지 주민들은 고된 항해 끝에 로어노크 섬에 첫발을 디뎠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정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뒤인 1590년, 필요한 보급품을 구하기 위해 잠시 영국으로 돌아갔던 존 화이트 총독이 다시 로어노크에 도착했을 때, 식민지 전체는 마치 유령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남아있는 것은 식민지 목책에 새겨진 ‘CROATOAN’이라는 단어와 나무에 조각된 ‘CRO’라는 글자뿐이었다. 인명 피해의 흔적도, 외부 침입의 명확한 증거도 없이 사라진 115명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하고 불가사의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됐다.
이 불가사의한 증발 사건은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그리고 일반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끝없는 추측과 논쟁을 낳았다. 식민지 주민들이 인근 원주민 부족과의 통합을 선택했다는 설부터, 외부 세력의 공격이나 질병 때문이라는 가설, 혹은 혹독한 자연환경과 기근으로 인해 집단 이주를 감행했다는 설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끊이지 않고 제시됐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첨단 고고학적 발굴 기술과 과학적 분석, 그리고 DNA 연구가 계속 진행되며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로어노크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넘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생존을 위한 투쟁, 그리고 문화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인류 역사에 큰 수수께끼로 남은 로어노크 식민지 증발 사건, 과연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남긴 마지막 단어 ‘CROATOAN’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크로아토안과의 통합 설: 사라진 이들의 흔적은 어디에?
로어노크 식민지 주민들이 인근 원주민 부족인 크로아토안족(오늘날 럼비족의 조상으로 추정되며, 현재 노스캐롤라이나주에 거주하고 있다)에 합류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현재까지도 가장 유력하게 거론됐다. 존 화이트 총독이 영국으로 떠나기 전 식민지 주민들과 약속했던 기록에 따르면, 만약 그들이 강제로 이동하게 될 경우 특정 장소에 몰타 십자가를 새겨두기로 했다. 하지만 화이트 총독이 1590년 돌아왔을 때, 그는 몰타 십자가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강제 이주가 아닌 자발적인 이동을 시사하며, 심각한 식량 부족이나 질병 등 생존을 위한 절박한 선택으로 원주민 사회에 동화됐을 가능성을 크게 높인다. 당시 로어노크 지역은 비옥했지만, 정착민들이 농업 기술이나 현지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자체적인 식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현지 원주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도움을 받거나, 아예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주장들은 20세기 초부터 제기됐다.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럼비족 중 일부에게서 유럽인과 유사한 푸른 눈, 금발 등 외모적 특징이 발견되고, ‘Dare(데어)’, ‘Sampson(샘슨)’, ‘Harris(해리스)’ 등 로어노크 식민지 주민의 성씨와 일치하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다수 확인됐다. 이는 단순한 우연을 넘어, 유럽인 조상이 원주민 사회에 흡수됐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일부 기록에는 17세기 초 버지니아 식민지 정착민들이 내륙에서 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로 보이는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보고도 있어, 통합설에 대한 증거는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외모적 특징이나 성씨의 일치만으로 로어노크 주민들과의 직접적인 혈연관계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이어져 내려온 이러한 유사성들은 미스터리를 풀어줄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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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위협과 환경적 요인: 생존을 위한 투쟁
로어노크 식민지 주민들의 실종에 대한 또 다른 가설로는 원주민 부족과의 갈등이나 스페인 세력의 공격 가능성이 제기됐다. 당시 영국과 스페인은 신대륙의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스페인이 영국 식민지를 제거하기 위해 공격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과거에는 힘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로어노크 현장에서는 대규모 전투 흔적이나 수많은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이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스페인 함대가 로어노크를 공격했다면 필연적으로 전투의 흔적과 파괴된 정착지의 모습이 남아 있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보다는 예측 불가능한 자연환경과 혹독한 기후 변화가 식민지 주민들의 생존에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오늘날에는 우세하다.
특히 2000년대 초, 미국 고고학 저널(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에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무 나이테 분석을 통해 1587년부터 1589년까지 북미 동남부 지역에서 최악의 가뭄이 닥쳤음이 밝혀졌다. 이 연구는 식민지 주민들이 로어노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다. 심각한 가뭄은 식량 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마실 물의 고갈과 더불어 사냥감 감소로 이어져 식량 자원이 바닥났을 것이다. 또한, 오염된 식수와 영양 부족은 질병의 확산을 가속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식량과 자원이 고갈되고 질병이 만연한 상황에서 식민지는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한 상태가 됐을 것이다. 결국,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로어노크 섬을 버리고 물과 식량을 찾아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떠나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설은 현장에서 전투 흔적이 없는 이유와 식민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CROATOAN’이라는 단어를 남긴 이유를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현대 고고학과 DNA 연구의 발자취: 미스터리를 풀 실마리
21세기에도 로어노크 식민지 증발 사건을 풀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로어노크 섬 인근 육지에서 식민지 주민들의 흔적을 찾기 위한 대규모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사이트 X(Site X)’, 즉 노스캐롤라이나주 버티 카운티에 위치한 ‘메톰프슈엣(Metompsewett) 사이트’는 이주설에 가장 강력한 증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17세기 초 영국 정착지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사한 도자기 조각, 파편들이 다수 발견됐다. 이는 사라진 식민지 주민들이 로어노크 섬을 떠나 내륙으로 이동하여 원주민 사회와 교류하며 살아갔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럼비족 후손들의 DNA 분석을 통해 로어노크 식민지 주민들과의 혈연관계 여부를 밝히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특정 성씨를 가진 럼비족 후손들의 DNA를 채취하고, 과거 영국인의 유전자 정보와 비교 분석함으로써 직접적인 혈통 관계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사라진 식민지 주민들의 후손이 실제로 원주민 사회에 흡수됐는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고고학적 발굴과 유전학적 분석은 이 미스터리의 실체를 조금씩 밝혀내며, 과거의 베일에 싸인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하고 있다.
새로운 지도의 발견과 숨겨진 비밀
로어노크 식민지 미스터리를 푸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최근에 발견된 존 화이트 총독이 그린 1585년 지도 ‘버지니아(Virginia)’의 숨겨진 비밀이었다. 2012년, 대영박물관의 큐레이터는 이 지도에 덧대어진 종이 패치(patch)를 발견했고, 이를 조심스럽게 제거하자 놀라운 그림이 드러났다. 패치 아래에는 로어노크 섬에서 서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요새의 위치와 ‘요새(fort)’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요새는 로어노크 섬 내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더 내륙 깊숙한 곳에 건설될 예정이었거나 이미 건설됐을 수도 있는 새로운 정착지의 후보지였다.
이 발견은 로어노크 식민지 주민들이 로어노크 섬을 떠나 내륙으로 이동하려 했음을 시사하는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증거가 됐다. 이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도피가 아닌, 전략적인 이동 계획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만약 이 요새가 건설됐다면, 이는 식민지 주민들이 스페인이나 적대적인 원주민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고, 더 풍부한 자원과 안전한 환경을 찾아 이동을 계획했거나, 실제로 옮겨갔을 가능성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이 새로운 지도의 발견은 기존의 가설들을 재검토하고, 사라진 식민지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탐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고고학자들은 이제 이 지도에 표시된 내륙 요새 지역을 집중적으로 탐사하며 로어노크 주민들의 흔적을 찾고 있다.
로어노크 식민지 증발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의 생존과 적응, 그리고 이종 문화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다.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고고학, 유전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속적인 연구와 새로운 기술의 적용은 이 수수께끼의 실체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비록 115명의 운명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 사건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류의 끝없는 탐구 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며, 미래 세대에게도 역사적 호기심과 중요한 교훈을 안겨줄 것이다. 로어노크는 영원히 ‘사라진 식민지’로 기억될 것이지만,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과거를 탐구하는 중요성을 일깨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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