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이 점차 흐려지는 노인의 모습을 묘사한 이미지.
‘살인자의 기억법’은 어떤 소설일까?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이 점차 소멸해가는 연쇄살인범의 시점
김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출간과 동시에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평단의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이 작품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독특한 설정과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동시에 던지며 수많은 독자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이 점차 소멸해가는 연쇄살인범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이 작품이 어떤 서사를 담고 있으며,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어떤 심오한 메시지를 던지는지 심층적으로 탐구해본다.

기억의 감옥에 갇힌 연쇄살인범, 김병수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김병수는 한때 대한민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자신만의 살인 철학을 구축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이 쇠퇴하는 70대 노인이 됐다. 살인자의 광기 대신 치매 노인의 혼란과 나약함이 그를 지배한다. 과거의 악행은 흐릿한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그의 현재는 끊임없이 의심과 혼란에 잠식된다.
김병수는 사라져가는 과거의 파편을 붙잡기 위해 자신의 범죄를 기록한 일기장을 필사적으로 작성한다. 마치 낡은 사진첩처럼, 그의 일기장은 사라져가는 기억을 대신해주는 유일한 증거가 됐다. 그는 매일 아침 일기장을 펼쳐 자신이 누구였고 무엇을 했는지 확인해야만 간신히 자신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병세가 깊어질수록 일기장조차 불완전한 기록이 되고, 현실과 망상,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져만 갔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한 기억조차 의심하기 시작하며, 심지어는 자신이 진짜 살인범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처럼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독자들 역시 그의 혼란에 고스란히 동참하게 만들며, 무엇이 진실인지 끝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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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살인자의 등장, 그리고 뒤엉킨 부성애
김병수의 혼돈스러운 일상에 어느 날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우연히 그를 만났고,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살인자의 섬뜩한 냄새를 맡았다. 김병수는 수십 년간 쌓아온 살인 본능으로 그 남자가 자신과 동일한 부류의 존재, 즉 또 다른 연쇄살인범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의 불안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는 듯했다.
김병수는 그 남자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자 삶의 마지막 희망인 딸 은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도 딸을 지키고자 하는 부성애는 그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됐다. 살인자로 살아온 그의 과거와는 상반되는, 순수하고 강력한 부성애가 그의 모든 행동을 지배한다. 그는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입증하고, 나아가 딸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진범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그의 기억은 계속해서 오류를 일으키고, 사건의 단서들은 뒤죽박죽 섞여 버린다. 그는 쫓고 있는 대상이 진짜 위협적인 살인범인지, 아니면 자신의 혼란스러운 내면이 만들어낸 편집증적인 환상 속에서 헤매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문을 품게 된다. 이러한 전개는 독자에게도 같은 의문을 던지며, 누가 진짜 살인범이고 누가 피해자인지에 대한 예측 불가능한 스릴을 선사한다.

진실과 기억의 불완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이 소설은 치매라는 파격적인 설정을 통해 ‘기억의 불완전성’이라는 핵심 주제를 다각도로 파고든다.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는 ‘진실’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이 기억에 얼마나 깊이 의존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김병수는 자신의 과거 범죄를 정당화하려 하거나, 혹은 아예 잊으려 애쓰는 모습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는 기억이 사라져가는 과정에서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해체되는 고통을 겪고, 독자들은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깊이 성찰하게 된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단순히 범인을 쫓는 스릴러를 넘어, 과거의 죄가 현재와 미래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 그리고 악인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는 인간적인 연민과 부성애를 통해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그린다.
과연 연쇄살인범의 부성애는 진정한 사랑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집착에 불과할까? 이 질문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진짜 악인인지에 대한 강렬한 질문을 마주하게 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독자에게 기억이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그 기억 위에 세워진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예측 불가능한 반전과 깊이 있는 심리 묘사, 그리고 윤리적 딜레마를 통해 독서 후에도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단순한 범죄 스릴러의 장르적 쾌감을 넘어 인간 본질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경험하고 싶다면,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의심할 여지 없이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다. 이 소설은 독서 그 이상의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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