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조건 된 탄소 배출권이 곧 자산이 되는 역설
한 철강 기업의 에너지 담당자가 겪는 고민은 수십억 원짜리 무형의 자산, 바로 ‘배출권’에 관한 것이다. 당장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감축 설비 투자를 늘릴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서 비싼 값을 주고 배출권을 사들여 규제 준수 의무를 채울 것인가? 이 고차 방정식은 단순히 환경 규제를 넘어, 기업의 재무 건전성과 미래 생존 전략을 좌우하는 핵심 딜레마로 한국 산업계 전반을 짓누르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 허용량을 정해주고 남거나 부족한 배출량을 기업 간에 사고팔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인 배출권거래제(ETS)가 이제는 기업 경영의 최전선에 서게 됐다.

보이지 않는 자원, 배출권거래제(ETS)의 작동 원리
배출권거래제는 ‘Cap & Trade’ 방식의 대표적인 환경 정책 도구다. 정부가 국가 전체의 온실가스 배출 총량(Cap)을 설정하고, 이를 기업별로 할당한 뒤, 기업들이 할당량 내에서 배출하고 남거나 부족한 배출권을 시장에서 거래(Trade)하도록 허용한다. 이 제도의 핵심은 ‘탄소에 가격을 매기는 것’이다. 기업은 배출권을 초과할 경우 과징금을 물거나 시장에서 비싼 값을 주고 배출권을 사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감축 투자를 유도하는 경제적 유인책으로 작용한다.
우리나라의 배출권거래제(K-ETS)는 2015년 도입된 이래 현재 제3차 계획기간(2021~2025년)을 지나고 있다. 1, 2차 기간이 제도의 연착륙에 초점을 맞췄다면, 3차 기간부터는 유상 할당 비중이 확대되고 할당량이 더욱 엄격해지면서 기업들의 실질적인 감축 부담이 급격히 늘어났다. 특히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등 에너지 다소비 업종이 주를 이루는 국내 산업 구조의 특성상, 할당량 부족 문제는 곧바로 막대한 배출권 구매 비용으로 이어졌다.
3차 계획기간의 현실: 기업들의 ‘탄소 부채’와 가격 변동성
3차 계획기간에 접어들면서 국내 배출권 시장은 심각한 유동성 부족과 가격 변동성 문제를 겪고 있다. 정부가 설정한 총 배출 허용량 자체가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달성을 위해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은 매년 줄어드는 ‘파이’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배출 효율이 낮은 기업일수록 할당량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배출권 가격은 시장 수급 상황에 따라 출렁이며, 이는 기업의 경영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요인이다. 배출권 가격이 급등할 경우, 기업들은 예상치 못한 대규모 ‘탄소 부채’를 떠안게 된다. 이는 단순히 비용 증가를 넘어, 기업의 투자 계획 자체를 흔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출권 가격이 톤당 4만 원을 넘어설 경우, 수백만 톤의 배출권이 필요한 대형 기업은 수천억 원의 추가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배출권이 재무제표의 중요한 항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탄소 관리는 이제 환경 부서만의 업무가 아닌 최고경영진(CEO)의 핵심 전략이 됐다.

감축 비용 vs. 구매 비용: 생존을 위한 고차 방정식의 해법
기업들은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첫째, 당장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공정 자체를 저탄소 방식으로 혁신하는 감축 투자를 단행하는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배출권 구매 비용을 절감하고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지만, 초기 투자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둘째, 단기적인 비용 절감을 위해 시장에서 배출권을 구매하여 규제를 준수하는 것이다. 이는 당장의 부담은 덜 수 있으나, 미래의 배출권 가격 상승 위험에 노출되며 근본적인 감축 노력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구매 전략은 한계가 있으며, 결국 근본적인 기술 혁신과 공정 전환만이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보장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2030년 NDC 목표 달성을 위해 남은 기간이 짧아지면서, 기업들은 더 이상 감축 투자를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 배출권거래제는 기업들에게 ‘탄소 감축’을 단순한 사회적 책임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시장 활성화와 투기 방지, 정책 당국이 풀어야 할 이중 과제
배출권거래제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가격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K-ETS는 참여자가 할당 대상 기업으로 제한돼 있어 거래량이 적고 가격 변동성이 크다. 이에 따라 정부는 금융기관 등 제3자의 시장 참여를 확대하고, 시장 조성자 역할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투기적 거래를 방지하고, 배출권 가격이 실질적인 감축 노력을 반영하도록 유도하는 정책 설계가 필수적이다. 배출권 가격이 너무 낮으면 감축 유인이 사라지고, 너무 높으면 기업의 경쟁력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책 당국은 총량 규제를 엄격히 유지하면서도, 시장의 효율성을 높여 기업들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다.
배출권거래제는 이제 단순한 환경 규제를 넘어, 기업의 재무제표와 미래 전략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자리 잡았다. 탄소중립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이 ‘보이지 않는 자산’인 배출권을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하느냐가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하는 새로운 생존의 방정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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