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혈전색전증(VTE) 위험 20배 급증… 수술 전후 경구 피임약 복용 중단해야
수술을 앞둔 여성 환자들에게 경구 피임약 복용 중단은 생명을 지키는 필수 안전 수칙으로 강조되고 있다. 의료계는 수술 전후 기간에 경구 피임약을 복용할 경우, 심각한 합병증인 정맥혈전색전증(VTE) 발생 위험이 최대 20배까지 급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VTE는 심부정맥 혈전증(DVT)이나 폐색전증(PE)으로 이어져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질환이다. 특히 에스트로겐을 함유한 복합 경구 피임약이 혈액 응고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주범으로 지목됐다. 이에 따라 모든 종류의 수술을 앞둔 환자는 최소 수술 4주 전부터 피임약 복용을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피임약 에스트로겐 성분, 혈액 응고 인자 활성화시켜
경구 피임약이 혈전 위험을 높이는 근본적인 원인은 약물에 포함된 에스트로겐 성분 때문이다. 에스트로겐은 간에서 혈액 응고 인자(특히 7, 8, 10번 인자 및 피브리노겐)의 생성을 증가시키고, 동시에 혈전을 용해하는 섬유소 용해 활성(Fibrinolytic activity)을 감소시킨다. 이로 인해 혈액이 평소보다 쉽게 응고되는 ‘과응고 상태(Hypercoagulable state)’가 된다. 일반적인 건강한 상태에서도 경구 피임약 복용만으로 VTE 위험은 약 3~5배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수술이라는 추가적인 위험 요소가 더해지면서 혈전 발생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수술 과정에서는 혈관 내피 손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이는 혈전 생성의 주요 시작점이다. 또한, 전신 마취나 대수술 후 환자는 장시간 움직이지 못하는 부동(Immobility)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혈액 순환을 정체시켜 혈전 생성을 더욱 촉진한다. 이 세 가지 요소(과응고 상태, 혈관 손상, 혈액 정체)가 결합하는 것을 의학적으로 ‘비르호의 삼징후(Virchow’s Triad)’라고 부르며, 수술 전후 경구 피임약 복용은 이 삼징후를 모두 충족시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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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전 최소 4주 중단 필수… 회복기까지 복용 금지 지침
전문의들은 수술 종류와 관계없이 경구 피임약 복용 중단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미국 산부인과 학회(ACOG) 및 주요 외과 학회 지침에 따르면, 혈전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수술 전 최소 4주(28일) 동안 피임약 복용을 완전히 중단해야 한다. 이는 피임약 성분이 체내에서 완전히 배출되고 혈액 응고 인자들이 정상 수준으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중단 시점은 수술의 종류와 예상되는 부동 기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만약 수술이 매우 간단하고 부동 기간이 짧은 경우(30분 미만의 간단한 시술)에는 2주 전 중단이 고려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4주 중단이 표준이다. 특히 복부 수술, 고관절 수술, 정형외과 수술 등 혈전 위험이 높은 수술을 받는 환자는 이 지침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 복용 재개 시점 역시 환자의 활동성이 완전히 회복되고 수술 후 합병증 위험이 사라진 이후에 의사와 상의하여 결정해야 한다.
서울 민병원 김종민 병원장은 “수술 전후 경구 피임약 복용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다. 특히 폐색전증은 증상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며 치명률이 높기 때문에 예방이 최선이다. 환자가 피임약 복용 사실을 의료진에게 숨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절대 안 된다. 수술 4주 전 중단은 타협할 수 없는 필수 지침이며, 만약 중단이 어렵다면 프로게스틴 단일 성분 제제나 비호르몬 피임법 등 안전한 대안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심부정맥 혈전증(DVT) 및 폐색전증(PE) 증상과 대처
수술 후 혈전이 발생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주요 증상을 인지하고 신속히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부정맥 혈전증(DVT)은 주로 다리 깊은 곳의 정맥에 혈전이 생기는 것으로, 해당 부위의 갑작스러운 통증, 부종, 피부색 변화(붉거나 푸르게 변함), 열감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한쪽 다리만 붓고 통증이 심하다면 즉시 의료진에게 알려야 한다.
더욱 위험한 것은 이 혈전이 떨어져 나와 폐동맥을 막는 폐색전증(PE)이다. 폐색전증이 발생하면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 가슴 통증, 빠른 심장 박동, 기침(때로는 피 섞인 가래), 실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이는 응급 상황으로, 지체 없이 응급실을 방문해야 한다. 의료진은 혈전 발생 위험이 높은 환자에게는 수술 후 조기 보행을 권장하고, 필요시 항응고제 투여나 압박 스타킹 착용 등의 예방 조치를 시행한다.
수술 기간 동안 안전한 피임 대안은?
경구 피임약 복용을 중단해야 하는 기간 동안 임신을 원치 않는 환자들은 대체 피임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수술 전후 기간 동안 호르몬 성분이 없는 피임 방법을 권장한다.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대안으로는 콘돔 사용, 살정제 사용, 또는 구리 자궁내 장치(IUD) 등이 있다. 특히 콘돔은 혈전 위험을 높이지 않으면서 성병 예방 효과도 겸할 수 있어 가장 널리 추천된다.
프로게스틴 단일 성분 피임약(미니필)은 복합 경구 피임약에 비해 혈전 위험이 현저히 낮지만, 수술 전후에는 이마저도 의료진과 상의하여 복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안전하다. 중요한 것은 환자가 자신의 피임약 복용 이력을 수술 전 마취과 의사, 외과 의사, 주치의 등 모든 관련 의료진에게 투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환자 안전을 위한 필수적인 정보 공유 과정이다.
서울 민병원 김종민 병원장은 “환자들이 수술 전 경구 피임약 복용 중단 지침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 혈전색전증과 같은 치명적인 합병증을 예방하는 첫걸음이다. 의료진 역시 환자 문진 시 피임약 복용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고, 중단 기간 동안의 안전한 피임 대안을 상세히 안내할 의무가 있다. 환자와 의료진 간의 긴밀한 소통이야말로 안전한 수술을 위한 핵심 요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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