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출길 열었지만 내부 재정 부담은 숙제… 영국산 의약품 미국 관세 3년간 0프로 적용에 한국 등 경쟁국 긴장
미국과 영국이 의약품 무역과 약가 정책을 둘러싼 역사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강력한 자국 우선주의 무역 정책 속에서, 영국은 자국산 의약품에 대한 관세 장벽을 제거하는 실리를 챙기는 대신 공공 의료 지출을 대폭 늘려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이번 합의는 단순한 무역 협정을 넘어 양국의 제약 바이오 산업 생태계와 공공 보건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무역확장법 파고 넘은 영국, 3년간 무관세 ‘프리패스’ 확보
지난 12월 1일 미국 무역대표부(USTR), 상무부, 보건복지부는 영국 정부와 의약품 가격 원칙에 합의했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합의의 핵심은 철저한 ‘주고받기’ 식 거래다. 미국은 이번 약속의 대가로 영국산 의약품과 원료, 의료기술에 대해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관세 대상에서 영국을 전면 면제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기간인 2029년 1월까지 무역법 301조에 따른 의약품 가격 관행 조사 대상에서도 영국을 제외하기로 했다. 영국 정부의 별도 발표에 따르면 양국은 영국산 의약품의 미국 수출 관세를 최소 3년간 0%로 유지하기로 확정했다. 이는 올해 9월 말 기준 최근 1년 동안 미국에 111억 파운드(약 19조 원) 상당의 의약품을 수출한 영국 제약 업계에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의약품이 대미 전체 상품 수출의 17.4%를 차지하는 영국의 수출 구조상,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국은 내년 1월부터 시작될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폭탄을 피하고 안정적인 수출로를 확보하게 됐다. 특히 이번 합의는 2026년부터 2028년까지 3년간 유효하며,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와 맞물려 영국 제약사들에게 확실한 사업적 예측 가능성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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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S의 결단, 20년 만에 신약 지출 빗장 푼다
영국이 얻은 ‘무관세’라는 과실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영국 정부는 이번 합의를 위해 자국의 자랑인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지출 구조를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합의안에 따라 영국은 혁신 신약에 대한 가격을 인상하고, 기존의 약가 제도로 인해 신약 가격이 과도하게 하락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영국은 혁신적이고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에 대해 NHS가 지불하는 순가격을 25% 인상할 예정이다.
또한 영국 정부는 NHS가 의약품 구매에 지출하는 전체 비용을 향후 10년에 걸쳐 GDP의 0.3% 수준에서 0.6%까지 두 배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이는 NHS가 의약품 지급 금액을 인상하는 조치로, 무려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영국은 엄격한 약가 통제 정책을 통해 NHS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해 왔으나, 이번 미국과의 경제번영협정(EPD) 이행을 위해 이러한 기조를 수정하게 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영국 국민의 세금 부담이나 의료 재정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환자들의 신약 접근성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공존하는 대목이다.

제약사 환급 부담 대폭 완화, 기업 하기 좋은 환경 조성
이번 합의에는 영국 내 제약회사들이 NHS에 납부해야 하는 이른바 ‘환급금’ 부담을 낮추는 내용도 포함됐다. 기존의 자발적 제도(VPAG) 하에서는 제약사들이 브랜드 의약품 판매 수익의 23.5%에서 최대 35.6%를 NHS에 환급해야 했다. 이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영국 시장 진출을 꺼리게 만드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새로운 환급 제도가 도입되면 이 비율은 15% 수준으로 대폭 인하된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영국 시장에서의 수익성이 크게 개선되는 셈이다. 영국 정부는 브랜드 의약품 가격 정책이나 기타 환급 제도로 인해 신약 가격 상승 효과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영국은 NHS가 더 비싼 값을 치르고 약을 사주는 대신, 자국에서 생산된 의약품이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지 않도록 관세 장벽을 제거하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한국 등 경쟁국엔 비상, 글로벌 바이오 시장 지각변동
영국과 미국의 이번 ‘0% 관세’ 합의는 한국을 비롯한 다른 경쟁 국가들에 상당한 위협이 될 전망이다. 유럽연합(EU), 일본, 한국, 스위스 등 주요 의약품 수출국들은 미국과 의약품 관세를 15% 선에서 합의한 바 있다. 영국이 무관세 혜택을 누리는 3년 동안, 이들 국가는 가격 경쟁력에서 영국에 뒤처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됐다.
특히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바이오시밀러 및 신약 개발 기업들은 영국의 약진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영국산 의약품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미국 시장 점유율을 확대할 경우, 동일한 치료 영역에서 경쟁하는 한국 기업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 있다.
한편,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화이자, 아스트라제네카, 일라이 릴리, 노보노디스크 등 거대 글로벌 제약사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최혜국 약가 인하’에 합의하고 3년간 관세 면제를 받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내년 1월부터 의약품 직접구매 플랫폼인 ‘TrumpRX.gov’를 가동하여 최혜국 수준의 약가 인하 혜택을 미국 소비자들에게 제공할 예정이다. 이러한 흐름은 향후 글로벌 의약품 가격 결정 구조에 연쇄적인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분석된다. 1월 관세 부과가 시작되기 전 발표될 세부 품목 관세 계획에 전 세계 제약 바이오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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