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슐린의 발견, 프레더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의 끈질긴 연구가 바꾼 인류의 역사
1920년대 초, 당뇨병 진단은 사실상 사형 선고와 같았다. 특히 어린이 환자들에게는 더욱 잔인한 현실이었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은 극도로 제한된 ‘기아 식단’뿐이었다. 이 식단은 환자의 생명을 몇 주나 몇 달 연장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 영양실조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했다.
절망이 지배하던 그 시대,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한 외과의사 프레더릭 밴팅(Frederick Banting)과 그의 젊은 조수 찰스 베스트(Charles Best)는 이 절망을 끝내기 위한 끈질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들의 연구는 단순한 의학적 발견을 넘어, 수백만 명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의 서막이었다. 인슐린의 발견은 어떻게 당뇨병을 ‘관리 가능한 질병’으로 만들었는지, 그 역사적 순간과 의미를 깊이 있게 되짚어본다.

절망의 시대, 당뇨병은 사형 선고였다
19세기 말, 과학자들은 당뇨병이 췌장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독일의 과학자 파울 랑게르한스(Paul Langerhans)는 췌장 내에 특별한 세포 집단(랑게르한스 섬)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후 과학자들은 이 섬에서 분비되는 물질이 혈당 조절에 핵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이 물질을 췌장으로부터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췌장이 가진 강력한 소화 효소들이 추출 과정에서 해당 물질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당뇨병 환자들은 이처럼 원인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 실질적인 치료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받았다. 특히 제1형 당뇨병을 앓는 아이들은 진단 후 1년 이상 생존하기 어려웠고, 부모들은 자녀가 쇠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의사들은 환자에게 탄수화물 섭취를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식단을 처방했는데, 이는 환자를 천천히 굶주리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인슐린 발견 이전의 당뇨병은 치료가 아닌, 고통스러운 연명 과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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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팅의 ‘아이디어’와 베스트의 ‘실행력’: 1921년 여름의 기적
1920년 10월, 캐나다 온타리오 주 런던에서 개업 중이던 젊은 외과의사 프레더릭 밴팅은 한 의학 저널을 읽다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췌장관을 묶어 소화 효소 분비를 막으면, 랑게르한스 섬 세포는 파괴되지 않고 혈당 조절 물질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토론토 대학의 생리학 교수 존 제임스 리처드 매클라우드(J.J.R. Macleod)에게 제안했다. 매클라우드 교수는 회의적이었지만, 밴팅에게 실험실 공간과 열 마리의 개, 그리고 의대생 조수 두 명을 여름 동안 제공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찰스 베스트였다.
1921년 여름, 밴팅과 베스트는 토론토 대학의 덥고 비좁은 실험실에서 끈질긴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은 췌장관을 묶은 개에게서 추출한 물질을 ‘아이슬레틴(isletin)’이라 명명하고, 췌장을 제거해 당뇨병에 걸린 다른 개에게 주사했다. 그 결과, 당뇨병에 걸려 죽어가던 개들의 혈당 수치가 극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 끈질긴 연구가 인슐린의 원형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경래 서울 민병원 내과 대표원장은 “인슐린의 발견이 인류 역사에 기여한 가장 큰 부분은, 당뇨병을 ‘필연적인 사망’에서 ‘만성적인 관리’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는 점”이라며, “특히 밴팅과 동료들이 특허를 단돈 1달러에 양도한 이타적인 결정은 인슐린이 전 세계 환자들에게 공급될 수 있는 인도주의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는 현대 의학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를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14세 소년 레너드 톰슨, 인류 최초의 희망을 만나다
동물 실험의 성공 이후, 연구팀은 매클라우드 교수의 지도 아래 생화학자 제임스 콜립(James Collip)을 영입하여 추출물의 정제 작업을 진행했다. 인체에 안전하게 투여할 수 있는 고순도 추출물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마침내 1922년 1월 11일,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임상 시험이 시작됐다. 토론토 종합병원에 입원해 기아 식단으로 생명이 위태롭던 14세 소년 레너드 톰슨(Leonard Thompson)이 최초의 인슐린 투여 대상자가 됐다.
첫 투여는 불순물로 인한 부작용이 있었지만, 콜립이 정제한 두 번째 투여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톰슨의 혈당 수치가 정상 범위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는 활력을 되찾았다. 톰슨은 인슐린 덕분에 27세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이 극적인 변화는 전 세계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었고, 당뇨병 치료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 됐다.
인슐린의 전파와 ‘생명을 위한 선물’
인슐린의 발견은 1923년 밴팅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을 안겨줬다. 하지만 밴팅은 매클라우드 교수가 자신의 공로를 과대평가했다고 주장하며 상금을 베스트에게 나누어줬고, 매클라우드 교수 역시 상금을 콜립에게 나누어줬다. 이들의 도덕적인 태도보다 더욱 중요한 결정은 인슐린 특허권에 대한 것이었다. 밴팅과 베스트, 콜립은 인슐린을 통해 돈을 벌기보다 인류에게 생명을 선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은 특허권을 토론토 대학에 단돈 1달러에 양도했으며, 이는 전 세계 제약 회사들이 인슐린을 대량 생산하여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만약 그들이 특허를 독점했다면 수많은 당뇨병 환자들이 치료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이들의 이타적인 결정은 인슐린이 ‘생명을 위한 선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0년 후, 인슐린이 남긴 유산과 현대 당뇨 관리
인슐린의 발견 100년이 지난 지금, 당뇨병은 여전히 전 세계적인 보건 문제이지만, 더 이상 사형 선고는 아니다. 밴팅과 베스트의 끈질긴 연구 덕분에 당뇨병은 만성적이지만 관리 가능한 질병이 됐다. 초기 동물 추출 인슐린에서 시작된 인슐린 치료는 이제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통해 생산되는 휴먼 인슐린, 그리고 작용 시간에 따라 세분화된 초속효성, 지속형 인슐린 등으로 발전했다.
인슐린 펌프와 연속 혈당 측정기(CGM) 같은 첨단 기술의 발전은 환자들이 더욱 정밀하고 편리하게 혈당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밴팅과 베스트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학적 성과를 넘어, 인류애와 헌신이 어떻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휴먼 스토리로 남아 있다. 그들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주며, 당뇨병 완치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혁 힘내라내과의원 원장은 “인슐린 치료는 지난 100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며 “초기 동물성 인슐린에서 유전자 재조합 기술의 휴먼 인슐린, 그리고 오늘날의 초속효성, 지속형 제제에 이르기까지 제형이 다양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속 혈당 측정기(CGM)와 인슐린 펌프 같은 첨단 기술의 결합으로 환자들이 훨씬 더 정밀하고 안전하게 혈당 변동성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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