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전공의 초과근무 1억대 수당 지급 명령 확정, ‘묵시적 포괄임금제’ 법적 종언 고하나
대법원에서 수련 과정에 있는 의사(전공의)들에게 미지급된 연장 및 야간 근로 수당을 병원이 지급해야 한다는 최종 판결이 나오면서 국내 의료계에 중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25년 9월 11일 확정된 이 판결은 과거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던 레지던트 3명에게 1인당 1억 6천만 원이 넘는 금액을 추가로 지급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그동안 의료계에 만연했던 장시간 근무와 초과 수당 미지급 관행에 제동을 걸고, 주니어 의사들의 노동 환경을 근로기준법의 테두리 안에서 재정립해야 한다는 법원의 명확한 신호로 해석된다.
이번 사법부의 판단은 특히 수련병원들이 오랫동안 적용해 온 ‘묵시적 포괄임금약정’이 정당성을 잃었다는 점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크다. 대부분의 대형 수련기관에서 전공의들의 근무 시간을 정확히 기록하거나 관리하지 않아 발생했던 ‘그림자 노동’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들의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판례가 확립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의료계는 유사한 법적 청구가 전국 수련병원을 대상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주시하며 비상한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현재까지는 대규모의 집단 소송이 즉각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은 아니나, 이번 판결을 근거로 전국전공의노동조합(전공의노조)은 근로조건 실태조사와 함께 병원 측에 단체 교섭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이미 일부 로펌에서는 원고인단 모집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됐으며, 수련병원들은 법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긴급 회의를 소집하는 등 향후 법적 분쟁 가능성에 대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법원 판결의 핵심 분석: 수련 계약의 근로기준법상 재해석
이번 대법원 판결의 가장 중요한 법적 쟁점은 병원이 전공의들과 체결했던 근로 조건의 유효성 여부였다. 재판부는 서울아산병원에서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근무했던 레지던트들이 제기한 초과근무 수당 청구 소송에서, 병원 측이 주장한 묵시적인 포괄임금 약정이 근로기준법의 정신에 비추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포괄임금제는 실제 근무 시간에 관계없이 고정된 수당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통상적으로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직종에서 제한적으로 인정되지만, 법원은 전공의 근무 환경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주당 80시간으로 명시된 근로 약정 역시 근로기준법상의 연장 근로 한도를 초과하는 부분이 명확했기에 무효로 판단됐다.
이러한 결정은 수련 과정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전공의를 명백한 근로자로 인식하고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사법부의 확고한 입장을 반영한다. 2심 판결에서 초과 임금이 개인당 약 1억 7천만 원 수준으로 대폭 증가한 것 역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던 장시간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산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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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계의 비상대응 태세: 줄소송 우려 속 수련병원협의회의 긴급 이사회 소집
이번 판례는 수련병원들의 재정적 부담 증가와 더불어 운영 방식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국 수련병원장들의 모임인 대한수련병원협의회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정례 이사회 외에 법률 자문 및 대응책 마련을 위한 긴급 이사회를 소집할 계획을 발표했다. 협의회 관계자는 현재 시점에서는 전국적으로 전공의를 상대로 한 소송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은 아니지만,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집단 소송 또는 전공의노조와의 단체 교섭 요구에 대비하여 법리적 방안을 조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다만, 모든 병원의 상황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번 판결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 서울아산병원은 이미 소송이 제기된 2018년 이후부터는 전공의의 근로 계약 규정을 개정하고, 근로기준법에 기반한 수당 체계를 적용하여 임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대형 병원들 역시 각기 다른 계약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일률적인 소송 확산보다는 병원별 근로 실태에 따라 법적 분쟁의 양상이 달라질 것으로 관측된다.

전공의 노조의 공세 전환: ‘그림자 노동’ 실태 조사와 단체 교섭 요청
전국전공의노동조합은 대법원의 최종 결정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이를 전공의 처우 개선을 위한 구조적 변화의 기회로 삼겠다는 전략을 밝혔다. 전공의노조는 이 판결이 왜곡된 임금 체계를 바로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당장 구체적인 근로 실태 조사를 시행할 계획이다. 노조는 병원별 계약서가 수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현장에서의 초과근무 관행과 처우는 개선되지 않았다고 판단하며, 이번 조사를 통해 실제 ‘그림자 노동’의 규모와 미지급 수당 실태를 명확히 밝혀낼 계획이다.
유청준 전공의노조 위원장은 연합뉴스에 보건복지부를 대상으로 하는 노정교섭과 대한수련병원협의회를 대상으로 하는 산별 교섭을 동시에 요청하여 전공의들의 근로 환경을 전반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와 더불어 노조는 각 전공의들에게 판결의 법적 의미와 급여 계산법 등을 안내하는 설명회를 개최하며 개별적인 권리 확보를 지원할 방침이다.
개별 청구의 현실적 장벽: 임금 채권 소멸 시효와 증거 확보의 어려움
이번 억대 수당 판결에 고무되어 개별 소송을 고려하는 전공의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실제 청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현실적인 난관이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임금 채권의 소멸 시효가 3년이라는 점이다. 즉, 현재 시점으로부터 3년 이전에 발생한 미지급 임금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청구권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2014~2017년 근로분이 인정된 이번 아산병원 사례는 소송 제기 시점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특수한 경우로 분석된다.
또한, 소송을 준비하는 전공의들에게는 초과 근무 사실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 자료를 모으는 과정이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법적 승소 가능성은 개인이 확보한 근로 증거의 구체성과 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기간에 달려 있으며, 이는 향후 소송 전개의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수련 과정의 의사들에게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인정하고, 장시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의료계 전반은 이 판례를 계기로 전공의의 근로 환경을 근로기준법에 부합하도록 구조적으로 개혁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됐다. 향후 전공의노조의 실태 조사 결과와 수련병원들의 대응 방향에 따라 국내 의료 시스템의 노동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될지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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