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질, 식도, 고환까지 위협하는 ‘정맥류의 역습’
오랫동안 서 있거나 앉아 일하는 직장인 A씨는 다리가 붓고 저리는 증상 때문에 하지 정맥류를 의심했다. 하지만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A씨의 만성적인 치질 문제와 소화 불량 증상까지 함께 물었다. A씨는 다리 혈관 문제와 항문, 소화기 문제가 무슨 상관인지 의아해했다.
이는 많은 사람이 겪는 오해의 단면을 보여준다. 흔히 ‘하지 정맥류’로 알려진 정맥류 질환은 다리에만 국한된 국소 질환이 아니며, 인체 내 다른 부위의 정맥에서도 발생하여 치질, 식도 정맥류, 고환 정맥류(정계정맥류) 등 심각한 전신 질환으로 나타날 수 있다. 다리에서 시작된 문제가 사실은 전신 정맥 건강의 심각한 경고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 정맥류에 갇힌 시선: 다리 통증이 전부라는 오해
정맥류는 정맥 내 판막이 손상되거나 기능이 저하되어 혈액이 역류하고 정맥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는 질환을 통칭한다. 대중적으로는 중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다리 부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하지 정맥류가 정맥류 질환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돼 왔다. 다리의 정맥류는 피부 밖으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오거나 푸른 혈관이 비쳐 보이는 등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환자들이 쉽게 인지하고 치료를 받게 된다.
그러나 정맥류는 다리뿐만 아니라 혈액 순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모든 정맥에서 발생 가능하며, 특히 복부 압력이 높아지기 쉬운 부위에서 은밀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이 간과돼 왔다.
혈압약 복용 중단 반복, 뇌졸중 위험 2배↑… 만성 질환 관리 비상
전신을 덮치는 정맥류: 치질, 식도 정맥류, 고환 정맥류의 실체
정맥류가 다리 외 신체 부위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예시는 항문 정맥총에 발생하는 치질(치핵), 간경변증 환자에게 치명적인 합병증을 유발하는 식도 정맥류, 그리고 남성 불임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고환 정맥류(정계정맥류)다. 이들은 모두 정맥의 확장과 혈액 역류라는 공통된 병태 생리를 공유한다. 치질은 항문 주변 정맥에 압력이 가해져 정맥이 부풀어 오르는 상태이며, 이는 사실상 항문에 생긴 정맥류로 볼 수 있다.
식도 정맥류는 간 질환 등으로 인해 간 문맥압이 상승하면서 식도 정맥이 부풀어 오르는 현상으로, 파열 시 대량 출혈을 유발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고환 정맥류 역시 고환 주변 정맥의 판막 기능 이상으로 혈액이 역류하여 고환 온도를 높이고 정자 생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질환이다. 이처럼 정맥류는 단순한 미용적 문제를 넘어, 장기 기능 장애나 생명에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서울 민병원 김혁문 외과 진료원장은 “정맥류를 국소적인 다리 질환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며, “특히 복압이 만성적으로 높은 환경에 놓인 사람들은 다리뿐만 아니라 내장 기관 주변의 정맥까지도 정체와 확장의 위험에 노출된다. 치질이나 정계정맥류 등 다른 부위의 정맥류가 발견됐다면, 이는 전신적인 정맥 순환계의 약점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으므로 통합적인 혈관 검사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판막 기능 부전과 압력 증가: 정맥류 발생의 근본 원인
정맥류가 신체의 여러 부위에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맥 판막의 기능 부전과 만성적인 정맥 압력 증가에 있다. 정맥 판막은 혈액이 심장으로 흐르도록 돕고 역류를 막는 역할을 한다. 유전적 요인, 노화, 비만, 장시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생활 습관 등은 판막에 지속적인 부담을 주어 결국 판막 기능을 약화시킨다.
특히 복부 내 압력이 증가하는 상황(만성 변비, 무거운 물건 들기, 임신 등)은 하체와 복부 주변 정맥에 과도한 부하를 주며, 이는 하지 정맥류뿐만 아니라 치질, 정계정맥류 발생률을 동시에 높이는 핵심 요인이다. 즉, 정맥류는 특정 부위의 문제가 아니라, 전신 순환계의 압력 조절 실패가 국소적으로 발현된 결과로 봐야 한다.
숨겨진 정맥류 위험 신호: 조기 진단과 예방의 중요성
정맥류는 진행성 질환이므로 조기 발견과 관리가 필수적이다. 다리 통증이나 부종 외에도, 만성적인 항문 불편감(치질), 남성의 고환 통증이나 불임 문제(정계정맥류), 그리고 특히 간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소화기 출혈 위험(식도 정맥류) 등은 숨겨진 정맥류의 위험 신호일 수 있다. 이러한 증상들이 개별적인 질환으로만 치부되지 않도록, 의료진은 환자의 전신적인 생활 습관과 병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예방을 위해서는 복압을 높이는 습관을 개선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장시간 같은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면 주기적으로 스트레칭을 하거나 압박 스타킹을 착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서울 민병원 성종제 외과 진료원장은 “정맥류는 일단 발생하면 자연적으로 회복되기 어려우며, 방치할 경우 전신적인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만약 다리 정맥류 진단을 받았다면, 항문이나 고환 등 다른 정맥계통의 건강도 함께 점검하여 전신적인 정맥 건강 관리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기사
한국인 절반 감염 헬리코박터균, 위암의 주범 지목… 제균 치료의 딜레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