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불명의 해양 민족. 기원전 1200년경, 찬란했던 지중해 고대 문명을 붕괴시킨 정체불명의 해양 민족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기원전 13세기 말, 인류는 지중해 동부 연안을 중심으로 눈부신 문명의 정점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신왕국은 파라오의 절대 권력 아래 나일강 유역을 호령했고, 아나톨리아 고원에는 철기 기술의 선구자 히타이트 제국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군림했다. 에게 해에서는 미케네 문명이 황금 가면을 남겼으며, 레반트 해안의 우가리트는 국제 무역의 허브로서 번영을 누렸다. 이들 강대국은 복잡한 외교 관계와 교역망을 통해 견고한 ‘청동기 시대 세계화’를 이룩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영광은 불과 한 세대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기원전 1200년경을 기점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이들 문명을 덮쳤다. 도시들은 불타고, 궁전은 약탈당했으며, 교역로는 끊겼고,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제국들은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암흑시대’로 불리는 이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의 중심에는, 이집트의 기록에만 희미하게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집단, ‘바다 민족(Sea Peoples)’이 있었다.
3천여 년이 흐른 지금도 고고학과 역사학계의 가장 큰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이들, ‘바다 민족’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며, 그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문명의 황혼, 불타는 해안선
청동기 시대 붕괴의 속도와 규모는 가히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막강함을 자랑하던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사는 기원전 1180년경 완전히 파괴되고 유기되었으며, 제국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에게 해의 미케네 문명 역시 주요 궁전들이 화염에 휩싸이며 몰락했고, 이들은 문자(선형 B 문자) 사용법마저 잊어버린 채 기나긴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가장 극적인 증거는 현 시리아 해안의 고대 도시국가 우가리트에서 발견되었다. 발굴된 왕궁의 토판(점토판 문서) 저장소에서는 마지막 순간의 다급함이 묻어나는 외교 서신들이 발견됐다. 우가리트의 마지막 왕 암무라피는 키프로스의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적의 함선 7척이 나타나 해안을 유린하고 있다”며 절박한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도움은 끝내 도착하지 못했고, 우가리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무역 도시 중 하나에서 불탄 폐허로 전락했다.
이 모든 파괴의 배후에 ‘바다 민족’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이들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마주치는 모든 문명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린, 거대한 규모의 ‘침략자’이자 ‘이주자’ 집단이었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데자뷔 현상, 뇌의 순간적 오류 메커니즘 분석
이집트의 기록, 메디네트 하부의 증언
이 정체불명의 적들에 대한 유일하고도 가장 구체적인 기록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낸 유일한 문명, 이집트에 남아있다. 이집트 제20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3세는 자신의 장제전(葬祭殿)이 있는 테베의 메디네트 하부 신전 벽면에 ‘바다 민족’과의 격렬했던 전투를 상세한 부조와 상형문자로 새겨 넣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 3세 치세 8년(기원전 1177년경)에 ‘바다 민족’이라 불리는 이민족 연합이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이집트 델타 지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람세스 3세는 이들을 상대로 육전과 해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선포했다.
메디네트 하부의 부조는 전투의 격렬함뿐만 아니라, 이들의 정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들은 뿔 투구를 쓰거나 깃털 장식 관을 쓴 전사들, 특유의 둥근 방패와 긴 칼로 무장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더 주목할 점은, 이들 전사들 뒤로 소가 끄는 수레에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모든 살림살이를 싣고 따라오는 행렬이 묘사된 부분이다. 이는 그들의 침략이 단순한 약탈이나 군사 원정이 아니라, 기존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선 대규모 ‘민족 이동’이었음을 시사한다.

“바다 민족”이라는 이름의 연합체
이집트 기록은 ‘바다 민족’이 단일 민족이 아님을 분명하다. 이들은 ‘펠레세트(Peleset)’, ‘체케르(Tjeker)’, ‘셰켈레시(Shekelesh)’, ‘데니엔(Denyen)’, ‘웨셰시(Weshesh)’ 등 다양한 부족의 연합체였다. 이집트인들은 이들을 ‘바다로부터 온 이방인’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지칭했을 뿐이다.
이들 연합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왜 동시다발적으로 고향을 떠나 지중해 전역을 휩쓸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학계에서는 기후 변화로 인한 극심한 가뭄과 기근, 기존 제국들의 내부적인 정치·경제적 모순 심화, 연쇄적인 지진 발생(소위 ‘지진 폭풍’ 이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존의 사회 질서가 붕괴한 결과로 추정한다. 생존의 한계에 몰린 이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남하하면서,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거대한 도미노 현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 자원 고갈, 그리고 통치 시스템의 경직성이 결합될 때, 문명은 외부의 충격(바다 민족의 이동)에 예상보다 훨씬 취약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붕괴의 원인이자 동시에 붕괴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기원의 미스터리: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렇다면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왔는가? 이집트 기록은 이들이 ‘바다 한가운데 섬들’ 혹은 ‘북쪽 땅’에서 왔다고 모호하게 언급할 뿐이다. 학자들은 이들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이름의 유사성과 고고학적 유물을 대조해왔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들이 에게 해, 서부 아나톨리아(현 튀르키예), 그리고 발칸반도 일대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셰켈레시’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시칠리아(Sicilia)와, ‘셰르덴(Sherden, 람세스 2세 시대에 이미 등장)’은 사르데냐(Sardegna)와 연관 짓는 견해가 있다. ‘데니엔’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그리스인의 초기 명칭인 ‘다나오이(Danaoi)’와, ‘펠레세트’는 미케네 문명권 혹은 크레타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혹자는 트로이 전쟁의 패잔병들이나, 미케네 문명 붕괴 후 고향을 잃은 난민들이 이 연합체의 핵심을 이루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고, 이들 집단의 원 거주지에서 대규모 이주를 입증할 만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이들의 ‘기원’은 여전히 안갯속에 남아있다.
사라진 행방과 새로운 시작
기원전 1200년경 지중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바다 민족’은 이집트에서의 패배 이후 역사 기록에서 점차 사라진다.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이들은 ‘행방불명’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파괴한 문명의 폐허 위에 새로운 정체성으로 뿌리내렸다.
이들의 ‘행방’에 대한 가장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는 ‘펠레세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람세스 3세에게 패배한 후, 이들은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가나안 남부 해안(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및 이스라엘 남부 해안)에 정착하도록 허락받았다. 이들이 바로 성서에 등장하는 ‘블레셋(Philistines)’ 민족이다. 실제로 이 지역(가자, 아스돗, 아스켈론 등)의 초기 철기 시대 유적에서는 미케네 양식과 유사한 독특한 토기, 새로운 건축 기술 등 ‘바다 민족’의 문화적 흔적이 뚜렷하게 발견된다.
다른 집단들 역시 레반트 해안 곳곳에 소규모로 정착하거나 기존 민족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체케르’ 족은 가나안 북부의 도르(Dor) 항구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결국 ‘바다 민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의 낡은 제국들을 무너뜨리고 다가오는 철기 시대의 새로운 주역 중 하나로 변모한 것이다.
이처럼 바다 민족은 단순한 파괴자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촉매제’였다. 그들의 이동과 정착은 기존의 제국 중심적 질서를 해체하고, 페니키아, 이스라엘, 아람 왕국 등 새로운 지역 세력들이 성장할 수 있는 정치적 공백과 문화적 토양을 제공했다. 3천 년 전 이들의 대이동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기후 난민과 문명 충돌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역사적 성찰을 던져준다. ‘바다 민족’의 미스터리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는 고대 문명의 흥망성쇠를 푸는 열쇠이자 현대를 비추는 거울로 남아있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기사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데자뷔 현상, 뇌의 순간적 오류 메커니즘 분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