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남아시아 도시의 번화하면서도 평화로운 거리에서 사람들이 활기찬 일상을 보내고 있다.※AI 제작 이미지
킬링필드 200만 희생, 끝나지 않은 비극의 그림자와 50년 가까이 후의 현실은?
캄보디아에서 1970년대 중반 발생한 ‘킬링필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제노사이드 중 하나로 기록됐다. 폴 포트가 이끄는 극단적인 공산주의 정권인 크메르 루주는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을 장악한 뒤부터 1979년 초까지, 단 4년 만에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약 150만에서 20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농업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광기 어린 목표 아래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원년(Year Zero)’을 선포, 잔혹한 킬링필드의 비극을 시작했다. 이 비극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었다. 특정 이념을 강요하며 자행된 조직적인 인종 청소이자 지식인, 종교인, 소수 민족은 물론 이전 정권과 연루됐거나 서구 문물에 익숙한 이들, 심지어 안경을 쓴 사람까지도 ‘신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하여 무차별적으로 말살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집권 직후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원년’을 선언하며, 광기 어린 목표를 실행에 옮겼다. 모든 도시민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켰고, 사유 재산, 화폐, 종교를 폐지했으며, 외부 세계와의 철저한 단절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시민이 프놈펜 등 도시에서 강제로 쫓겨나 아무런 준비 없이 농촌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해야 했다. 집단농장에서 충분한 식량 배급 없이 강제 노동에 시달린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특히 의료 시설은 대부분 파괴됐고, 의사나 지식인들은 숙청 대상으로 몰려 전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다. 또한, 조금이라도 정권에 반대하거나 의심받는 이들은 ‘재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고문과 처형을 피할 수 없었다. 학살은 총알을 아낀다는 명분으로 몽둥이, 삽, 심지어 야자나무 잎사귀 등 비인간적인 도구를 사용해 이루어졌으며, 잔혹한 방식은 피해자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다. 학살된 시신들은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2만 개가 넘는 대규모 집단 매장지, 이른바 ‘킬링필드’에 버려졌다.
킬링필드의 참혹한 역사는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캄보디아 사회 곳곳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수많은 생존자는 여전히 그날의 트라우마와 싸우며, 정신적 고통뿐 아니라 신체적 후유증에도 시달린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캄보디아 전역에 흩어진 ‘킬링필드’ 기념비와 박물관을 통해 기억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역사를 교육하려는 노력도 이어지지만, 세대 간 기억의 격차와 화해의 문제는 여전히 캄보디아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국제사회는 이 비극에 대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렇다면 그 끔찍한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크메르 루주 정권의 잔혹한 통치
크메르 루주 정권은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을 함락하며 권력을 장악한 뒤, 광기 어린 혁명적인 사회 개혁을 단행했다. 이들은 ‘앙카(Angkar: 조직)’라는 익명의 통치 기구를 통해 모든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고,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특히 도시의 모든 주민은 단 며칠 만에 강제로 비워져 아무런 준비 없이 농촌으로 쫓겨났고, 이들은 집단농장에서 극심한 강제 노동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화폐와 사유 재산은 사라졌고, 종교 활동은 금지됐다. 전통적인 가족 단위마저 해체됐으며, ‘앙카’의 지시로 강제 결혼이 만연했다. 교육, 의료 시설은 파괴됐고, 지식인, 교사, 의사, 법조인 등은 물론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심지어 안경을 쓴 사람까지도 ‘신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돼 무차별적인 숙청의 대상이 됐다. 이러한 극단적인 정책은 캄보디아 사회 전체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고, 모든 비판과 반항은 가혹한 고문과 죽음으로 이어졌다. 정권은 사람들의 사상을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감시와 통제를 일상화했고, 이는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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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의 비극과 증거의 발견
크메르 루주 통치 기간 동안 자행된 학살의 규모와 잔혹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1979년 정권 붕괴 후,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2만 개가 넘는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으며,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수도 프놈펜 근교의 청아익(Choeung Ek)과 구 투올슬랭(Tuol Sleng) 고등학교를 개조한 S-21 수용소였다. S-21 수용소는 ‘두치’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카잉 구엑 에아브(Kaing Guek Eav)가 운영하던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 이곳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끌려와 고문당하고 처형됐으며,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수용소 관계자들은 수감자들의 사진, 심문 기록, 강압에 의한 자백서 등을 철저하게 기록해두었는데, 이 기록들은 킬링필드의 잔혹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있다. 청아익은 S-21 수용소에서 처형된 시신들이 주로 묻혔던 집단 매장지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 몽둥이, 삽, 낫 등으로 살해하는 비인간적인 방식이 동원됐으며, 심지어 어린아이들을 나무에 내리쳐 살해하기도 했다. 빗물에 씻겨 드러난 수많은 뼈와 옷가지들이 발견되면서 킬링필드의 존재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 현재 이 두 장소는 학살 박물관과 기념관으로 보존돼 방문객들에게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국제사회의 뒤늦은 응징과 정의 실현 노력
크메르 루주 정권은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붕괴됐지만, 폴 포트와 그의 측근들은 이후 수십 년간 캄보디아 국경 지대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냉전 시대의 복잡한 국제 역학 관계와 캄보디아 내전의 장기화는 킬링필드 책임자들에 대한 정의 실현을 더욱 지연시켰다. 국제사회는 킬링필드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노력을 뒤늦게 시작했다. 2006년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의 협력으로 특별재판소인 크메르 루주 전범 재판소(ECCC, 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가 정식 출범했다.
ECCC는 2022년 9월 마지막 판결을 내리기까지 16년간 총 3억 3천만 달러(약 4천억 원) 이상의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다. 재판부는 ‘두치’ 카잉 구엑 에아브(S-21 수용소장), 누온 체아(Nuon Chea, ‘형제 2호’), 키우 삼판(Khieu Samphan, 국가원수) 등 핵심 인물들에게 반인도적 범죄와 집단 학살(제노사이드)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특히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은 2018년 제노사이드 혐의까지 인정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 재판은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핵심 인물들만 심판했으며, 폴 포트 본인은 재판 전에 사망하는 등 학살의 책임자 전체를 심판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럼에도 ECCC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 중 하나에 대한 국제적인 정의 실현 노력의 중요한 한 걸음으로 평가됐다.
현재 캄보디아에 남은 상흔과 미래를 향한 노력
킬링필드는 캄보디아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수백만 명의 국민이 학살되거나 가족을 잃으면서 사회 전반에 걸친 정신적 트라우마는 여전히 깊다. 생존자들은 불안, 우울증,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다양한 정신 건강 문제에 시달리며, 이는 다음 세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세대 간 트라우마’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지식인과 전문가 집단의 말살은 캄보디아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크게 저해했으며, 사회 전반의 불신과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이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청아익과 S-21 수용소는 이제 학살 박물관과 기념관으로 보존돼 후세에게 역사적 교훈을 전달하는 중요한 장소가 됐다. 특히 캄보디아 문서센터(DC-Cam)는 킬링필드에 대한 포괄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며, 연구와 교육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캄보디아 정부는 교육 과정에 킬링필드 역사를 필수적으로 포함시켜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비극을 알리고,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건설하려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단순히 한 국가의 비극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경고다. 이 참혹한 사건은 권력의 오용과 극단적인 이념, 그리고 외부 세계의 무관심이 초래할 수 있는 파괴적인 결과를 명확히 드러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증대되는 극단주의와 편협한 이념의 확산 속에서 킬링필드의 교훈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국제사회와 캄보디아 국민은 정의와 치유를 위한 노력을 지속하며, 킬링필드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인류의 어두운 단면을 성찰함으로써 미래 세대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이 비극적인 경험은 인권의 중요성과 평화의 소중함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전 세계가 함께 기억하고 성찰해야 할 보편적인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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