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태생 첫 노벨상 수상자 찰스 피더슨, 잊혀진 그의 발자취와 역사적 맥락
지난 2024년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으로는 역대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되면서 대한민국 전체가 기쁨에 들떴다. 그러나 노벨상위원회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한강은 두 번째가 아닌 세 번째 한국 태생 수상자로 등재돼 충격을 준다. 이는 노벨상이 수상자의 국적이 아닌 출생지를 기준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 태생 두 번째 수상자이며, 한강은 세 번째다.
그렇다면 노벨상의 역사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가장 먼저 남긴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1987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찰스 피더슨이다. 그는 1904년 대한제국 부산에서 노르웨이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과학자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물론, 그가 한국과 맺었던 특별한 인연은 한국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찰스 피더슨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크라운 에테르’라는 초분자 물질을 합성하며 초분자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한 인물이다. 평생 박사학위 없이 산업현장에서 연구에 헌신했던 그의 삶은 여러모로 이채롭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으로 다시금 주목받게 된 찰스 피더슨의 잊혀진 이야기와 그의 과학적 성취, 그리고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자세히 살펴본다.

찰스 피더슨, 노벨상이 기록한 최초의 한국 태생
찰스 피더슨은 1904년 10월 3일 대한제국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선박 기술자로 일하던 노르웨이인이었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노벨위원회는 수상자를 국적이 아닌 출생지로 분류하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지를 따랐기에, 피더슨의 국적은 미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한국 태생 첫 노벨상 수상자로 공식 등재했다.
그는 8살까지 한국에서 생활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고,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화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미국 듀폰사의 잭슨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1967년, 분자들을 선택적으로 결합시키는 유기화합물인 ‘크라운 에테르’를 합성해냈다. 이 공로로 찰스 피더슨은 1987년 프랑스의 장마리 렌, 미국의 도널드 크램과 함께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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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운 에테르의 발견과 초분자화학의 새 시대
찰스 피더슨이 합성한 ‘크라운 에테르’는 특정 이온이나 분자를 선택적으로 붙잡아 화학적 반응을 유도하는 능력을 가진 고리형 유기 분자다. 당시 이 물질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했으나, 피더슨의 실험적 성공으로 실제 구현됐다. 이 발견은 여러 분자를 인위적으로 조합하여 새로운 성질을 가진 물질을 만들어내는 ‘초분자화학’이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의 씨앗이 됐다.
초분자화학은 생체 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분자 간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모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센서, 약물 전달 시스템, 나노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피더슨은 박사학위 없이 순수하게 산업 현장에서의 탐구와 실험을 통해 이와 같은 기념비적인 업적을 달성했으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기초 과학 연구뿐만 아니라 산업 기술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찰스 피더슨의 한국 인연과 근대사의 그림자
찰스 피더슨은 8세까지 한국에서 살았고, 이후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여름방학 등을 이용해 17세까지 매년 한국에 2~3개월간 머물렀다고 1987년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의 어머니 다키노 야스이의 가족은 당시 조선과 일본 간의 대규모 콩 및 누에 무역에 종사했다. 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활용하려는 경제 침략을 본격화했는데, 피더슨 외가의 콩 무역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특히 1880년대 중반부터 1890년대 초반까지 조선의 주요 수출품은 콩, 쌀, 쇠가죽 등 농산물과 피혁 원료가 압도적이었다. 이 시기 조선은 점차 일본 경제에 종속되는 구조로 전환됐으며, 찰스 피더슨의 탄생과 성장은 바로 이러한 구한말 조선의 비극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가족은 당시 조선 시장에서 강력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본계 무역 상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 조선 경제와 피더슨 가문의 역할
구한말 조선 시장은 열강의 각축장이었고, 특히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경제적 지배력을 빠르게 확대했다. 당시 조선의 최대 무역 파트너는 일본이었으며, 일본은 조선을 자국 산업에 필요한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재편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콩은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일방적인 수출 품목으로, 조선이 일본 경제에 예속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러시아 재무부의 1900년 보고서에도 일본이 값싸고 질 좋은 조선 콩에 의존하여 자국 내 콩밭을 뽕밭으로 전환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기록됐다. 조선 땅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감지됐다. 2006년 하원호 성균관대 연구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개항 후 부산에서는 대일 콩 공급을 위해 목화밭이 콩밭으로 바뀌는 사례가 증가했다.
찰스 피더슨의 외가는 이러한 대규모 콩 무역을 통해 일본의 조선 경제 침략에 일정 부분 기여한 가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의 한국 태생 노벨상 수상은 단순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복잡하게 얽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찰스 피더슨은 노벨화학상을 통해 인류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그의 출생 배경과 한국과의 인연은 한국 근대사의 아픈 단면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스토리는 노벨상이 단순히 한 개인의 국적을 넘어 출생지를 기준으로 인류의 지적 성취를 기리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 그리고 한 과학자의 탄생이 거대한 역사적 흐름과 어떻게 얽혀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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