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노벨 평화상 후보.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과 노벨 평화상 후보 지명이라는 역사의 냉소적 단면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과 억압을 자행했던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 이 세 명의 독재자가 모두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 해프닝을 넘어 평화의 가치와 그 이면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하는 이들이 어떻게 인류 평화의 최고 영예로 거론될 수 있었는지, 그 역설의 중심을 파고들어 본다.

‘평화’의 이름으로… 시대의 오판인가, 정치적 계산인가
이 충격적인 사실의 배경에는 당대의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와 ‘평화’라는 가치에 대한 모호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히틀러가 후보로 거론되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위태로운 시기였다. 일부 유럽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임박한 전쟁을 막기 위한 외교적 타협, 즉 ‘유화 정책(Appeasement)’이 절박한 평화 유지 방안으로 여겨졌다. 뮌헨 협정 등 일시적 긴장 완화를 ‘평화 공헌’으로 오인한 시각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히틀러의 위협을 조롱하거나, 노벨상의 후보 추천 과정을 비판하기 위한 ‘풍자적 추천’의 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무솔리니 역시 마찬가지다. 1930년대 초반, 그가 이탈리아의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잡았다는 왜곡된 인식이 일부 서구 지식인과 정치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에티오피아 침공과 같은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야욕이 드러나기 전, 그의 파시즘 통치가 일종의 ‘안정’을 가져왔다는 위험한 시각이 후보 추천의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스탈린의 경우는 더욱 복잡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맞선 연합국의 주요 축이었다. 서방 연합국 입장에서 스탈린은 파시즘이라는 거대한 악을 물리치기 위한 ‘필요악’이자 동맹이었다. 전쟁 종식에 기여했다는 명목, 즉 ‘전쟁을 끝낸 공로’가 평화상 후보로서의 자격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는 그의 잔혹한 독재와 숙청, 인권 탄압이라는 본질이 승전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일시적으로 가려졌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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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지명’의 문턱, 그 이면에 숨겨진 함의
이러한 논란적 추천이 가능했던 핵심적인 이유는 노벨 평화상의 독특한 ‘후보 지명’ 시스템에 있다. 노벨 위원회는 수상자 선정 과정의 공신력을 높이기 위해 전 세계의 다양한 인사들에게 후보 추천 자격을 부여한다. 각국 의회 의원, 정부 각료,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저명한 대학의 총장 및 특정 분야 교수, 그리고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노벨 위원회가 이 추천을 ‘접수’할 뿐, 추천 행위 자체가 위원회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매년 수백 건의 후보 추천서가 접수되며, 이 목록에는 종종 정치적 의도나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인물들이 포함된다. 즉, ‘후보 지명’은 단지 논의의 출발선에 섰다는 의미일 뿐, 그 인물이 평화상 수상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공인하는 절차가 아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스탈린의 사례는 이 추천 시스템이 시대의 혼란과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그리고 때로는 얼마나 순진하거나 냉소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노벨상의 권위, 역설에 갇히다
그렇다면 이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노벨 평화상의 권위를 훼손하는가? 역설적이게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노벨 위원회의 ‘최종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부각한다. 수많은 정치적, 이념적, 심지어 풍자적 의도가 담긴 추천 속에서 알프레드 노벨의 유지를 받들어 진정한 평화의 가치를 실현한 인물을 ‘선별’해내는 과정이야말로 노벨상의 핵심 권위이기 때문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은 결국 후보에 ‘머물렀을’ 뿐, 단 한 번도 진지한 수상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위원회는 이들을 걸러냄으로써, 그리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넬슨 만델라, 알베르트 슈바이처, 테레사 수녀와 같은 인물들을 선택함으로써 평화의 기준을 제시해왔다.
이 독재자들의 후보 지명 기록은 노벨상이라는 제도 역시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며, 시대적 한계와 정치적 압력 속에서 끊임없이 시험받아왔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노벨상의 무결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오염의 가능성 속에서도 그 이상을 지켜내려 한 분투의 역사, 그리고 그 최종 선택의 무게를 반증하는 자료로 남았다. 노벨상의 권위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후보 목록’이 아니라, 인류의 양심을 대변해온 ‘수상자 명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21세기에도 계속되는 ‘평화’의 논쟁
20세기의 이 역설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으로만 남아있지 않다. 최근 몇 년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역시 여러 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면서 국제적인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시도하고, 특히 중동에서 ‘아브라함 협약’을 중재하며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의 관계 정상화를 이끌어낸 점을 ‘평화에 대한 중대한 기여’로 높이 평가했다. 이들은 수십 년간 교착 상태에 있던 외교적 난제를 실용적인 접근으로 타개하려 시도했다는 점을 공로로 내세웠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그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이 파리 기후 협약 탈퇴나 이란 핵 합의(JCPOA) 파기 등 국제적 다자주의와 협력 체제를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의 언행이 국내외적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으며, 그가 중재한 중동 평화 협약 역시 팔레스타인 문제를 소외시키는 등 분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특정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정치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비판도 거세게 제기된다.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해묵은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평화’는 과연 무엇인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인가, 아니면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적극적인 투쟁인가?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의 이름이 평화상 후보 목록에 올랐다는 사실은, ‘평화’라는 단어가 얼마나 쉽게 권력자들에 의해 오용되고, 정치적 수사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독재자와 권위주의 정권이 ‘안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참칭한다. 그들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소수자를 탄압하면서도, 국제 무대에서는 평화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20세기의 이 냉소적인 기록은 우리에게 표면적인 ‘평화’의 이면에 숨겨진 폭력과 억압의 실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요구한다. 진정한 평화는 총성이 멈춘 침묵이 아니라, 모든 개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를 누리는 정의로운 상태임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결국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이라는 이름이 노벨 평화상 후보 목록에 올랐다는 것은, 그들이 평화에 기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고통스럽고도 절박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노벨 평화상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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