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소련 침공, 전 유럽을 장악했던 히틀러, 왜 ‘굳이’ 소련을 침공해 대재앙을 초래했나
제2차 세계대전은 약 8천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됐다. 1941년 당시, 나치 독일이 주도하는 추축국은 이미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장악하며 군사적으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영국만 정복하면 ‘천년 게르마니아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서부 전선의 영국을 마무리 짓지 않은 채 동쪽의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감행했다. 이는 군사 전략의 기본을 무시한 비이성적인 결정처럼 보였으며, 결국 나치 독일의 전선 확대로 이어져 전략적 실패와 폭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히틀러의 이 선택은 단순한 지도자의 광기가 아닌, 나치 이념과 독일의 특수한 경제 구조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였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나치 정권의 태생적 결함과 끊임없는 자원 약탈의 필요성이 결합하여, 소련 침공이라는 파국적인 결정을 유도했다는 점이 역사적 맥락을 통해 확인됐다.

나치 이념의 모순: 생존 공간(Lebensraum) 확보의 강박
히틀러의 나치 이념은 ‘기괴한 게르만 순열주의 파시즘’으로 정의된다. 이 이념은 게르만족을 가장 우수한 유전 형질을 가진 민족으로 규정하고, 독일이 위기에 처한 근본적인 원인을 열등한 민족과의 ‘피 섞임’에서 찾았다. 따라서 나치는 전쟁을 통해 다른 민족을 제거하고, 순수한 게르만족을 위한 위대한 낙원, 즉 ‘생존 공간(Lebensraum)’을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이러한 이념적 목표는 독일의 영토 확장이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닌, 종족적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의미했다. 특히 소련의 광대한 농업 지역과 방대한 자원은 나치가 꿈꾸는 ‘천년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요소였다. 영국과의 전쟁이 일시적인 군사적 승리라면, 소련 침공은 나치 이념의 최종 목표인 ‘영구적인 생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존재론적 전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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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재무장과 ‘가짜 어음’으로 쌓은 시한폭탄 경제
히틀러가 1934년 독일의 총통으로 등극한 후,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과 대공황의 여파로 극심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히틀러는 강력한 군사력 회복을 통해 국민의 불안을 잠재우려 했으나, 재무장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독일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즈’라는 경제 시스템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특히 ‘매포(MEFO)’라는 가짜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유사 어음(Mefo bills)을 발행했다.
매포 어음은 실제 가치가 없는 증서였지만, 정부의 지급 보증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미래의 부채를 증가시키는 행위였으며, 독일 경제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상태였다. 이 거대한 부채를 청산하고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전쟁과 약탈을 통해 외부 자원을 확보해야만 했다. 즉, 독일은 평화 상태에서는 경제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며, 따라서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것은 경제적 생존을 위한 ‘다단계적 접근’의 필수적인 수단이 됐다.

1940년 몰로토프 회담 결렬과 동맹의 파기
소련 침공 결정은 단순히 이념이나 경제적 필요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40년 11월, 독일은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을 베를린으로 초청하여 동맹을 제안했다. 이는 서구 연합국과의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 독일은 소련에게 세계 분할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으나, 소련은 발트해 지역과 발칸반도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동맹 제안을 사실상 거부했다.
소련의 거부는 히틀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는 소련이 잠재적인 적국임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히틀러는 소련이 언제든 독일의 동부 국경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미 영국과의 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소련의 방대한 자원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동부 전선을 정리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외교적 시도의 실패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군사적 행동의 방아쇠를 당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과 전쟁의 불가역적 전환
바르바로사 작전은 히틀러의 전략적 전제들이 모두 틀렸음을 증명하며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초기에 붕괴하고 모스크바를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소련의 방대한 영토, 혹독한 겨울, 그리고 소련군의 예상치 못한 저항에 직면했다. 독일은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했고, 전선은 끝없이 확대됐다.
소련 침공으로 인해 독일은 서부(영국)와 동부(소련)라는 두 개의 거대한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이는 독일의 군사력과 자원을 급격히 소진시켰고,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맞물려 독일은 양면에서 압박을 받게 됐다. 소련 침공은 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연합국 측에 유리하게 변화시킨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으며, 히틀러의 ‘천년 제국’ 꿈은 12년 만에 자멸하는 과정으로 귀결됐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 결정은 단순한 비이성적 선택이 아니었다. 이는 나치 이념이 요구하는 영구적인 ‘생존 공간’의 확보와, ‘매포 어음’으로 유지되던 독일 경제의 지속적인 약탈 필요성이 결합된 결과였다. 나치당은 권력 장악에만 몰두했지, 그 권력을 지속시킬 수 있는 건전한 비전이나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결국 나치 정권의 태생적 결함과 모순적인 구조가 히틀러를 극한의 군사적 도박으로 내몰았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재앙을 초래하고 나치 독일의 패망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본 기사는 다른 유튜버 분이 제작하신 유튜브 동영상을 참고·정리하여 기사화 하였습니다]
전 유럽을 장악했던 히틀러는 왜 ‘굳이’ 소련을 침공해서 폭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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