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가지 냄새를 구별하는 인간의 코: 1만 가지 상식을 뒤엎은 후각 능력의 재발견
오랫동안 인간의 후각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열등하며, 고작 1만 가지 정도의 냄새만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졌다. 이러한 통념은 20세기 초반의 비공식적인 추정치에 기반한 것으로, 과학적인 검증 없이 수십 년간 교과서와 대중 매체를 통해 반복됐다. 그러나 2014년, 미국 록펠러 대학교 연구팀이 과학 저널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획기적인 연구 결과는 이러한 상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연구팀은 인간이 최소 1조 가지 이상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통계적으로 입증했다.
이 연구는 인간의 후각 능력이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으며, 오히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정교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연구진은 128가지의 기본 후각 물질을 조합하여 수많은 복합 냄새 샘플을 만들고, 실험 참가자들이 두 가지 유사한 냄새를 구별해내는 능력을 측정했다. 이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통계적 모델링을 적용한 결과, 인간이 구별할 수 있는 냄새의 가짓수는 1000억 개를 훌쩍 넘어서 1조 개 이상에 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간의 후각 시스템이 가진 이 방대한 잠재력은 단순히 감각의 영역을 넘어선다. 냄새는 기억, 감정, 심지어 질병 진단에까지 깊숙이 관여하는 중요한 감각 정보로 재평가되고 있다. 특히 후각 기능의 저하가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신경 퇴행성 질환의 초기 징후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후각 연구는 생명 과학 및 의료 분야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코가 가진 1조 가지 냄새 구별 능력은 후각 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인간 지각의 한계를 다시 한번 분석하는 계기가 됐다.

1만 가지 통념을 깬 ‘1조 가지’의 계산 원리
오랫동안 후각 능력을 1만 가지로 제한했던 통념은 과학적 근거가 미약한 상태로 유지됐다. 이는 심리학자나 생리학자들이 다른 감각에 비해 후각을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2014년의 획기적인 연구는 이러한 관행을 깨고 엄격한 실험 설계를 도입했다. 연구팀은 26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128가지의 기본 냄새 분자를 무작위로 조합하여 10개, 20개, 30개 성분으로 구성된 복합 냄새 샘플을 만들었다. 이 복합 냄새들은 참가자들이 이전에 맡아보지 못한 새로운 냄새들이었다.
실험 참가자들은 세 가지 냄새가 담긴 바이알을 제공받았는데, 그중 두 개는 동일한 혼합물이었고 하나는 매우 유사하지만 미세하게 다른 혼합물이었다. 참가자들은 이 미세하게 다른 냄새를 구별해내는 ‘삼각 테스트’를 수행했다. 연구 결과, 참가자들은 30가지 성분이 섞인 복합 냄새에서도 50% 이상의 정확도로 미세한 차이를 구별해냈다. 이 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연구팀은 인간이 구별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냄새 조합의 수를 통계적으로 외삽(extrapolation)했다. 그 결과, 인간이 구별할 수 있는 냄새의 최소 가짓수는 1조 가지에 이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1만 가지라는 기존의 추정치보다 1억 배나 큰 수치로, 인간의 후각 시스템이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됐는지 보여준다.
400개의 수용체가 만들어내는 1조 가지의 스펙트럼
인간의 후각이 1조 가지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코 속에 위치한 후각 수용체(Olfactory Receptors, ORs)의 작동 방식 덕분이다. 인간의 유전자에는 약 1000개의 후각 수용체 유전자가 있지만, 이 중 실제로 기능하는 것은 약 400개 정도다. 이 400개의 수용체는 각각 특정 냄새 분자에 반응하도록 설계됐지만, 하나의 냄새 분자가 단 하나의 수용체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대부분의 냄새는 여러 종류의 수용체를 동시에 활성화시킨다.
이러한 ‘조합 부호화(Combinatorial Coding)’ 방식이 1조 가지라는 방대한 냄새 스펙트럼을 가능하게 한다. 400개의 수용체가 활성화되는 패턴은 무수히 많으며, 뇌는 이 수용체 활성화 패턴을 일종의 ‘바코드’처럼 해석하여 특정 냄새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냄새 A는 수용체 1, 5, 10을 활성화시키고, 냄새 B는 수용체 1, 5, 11을 활성화시킨다면, 뇌는 이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고 A와 B를 별개의 냄새로 구별해낸다. 이 조합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단 400개의 수용체만으로도 1조 개 이상의 고유한 냄새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된다.
이러한 조합 부호화 방식은 냄새의 강도나 농도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같은 냄새라도 농도가 달라지면 활성화되는 수용체의 강도나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커피 향이 약할 때와 강할 때를 구분할 수 있다. 이 복잡하고 효율적인 시스템 덕분에 인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화학적 자극을 정교하게 분류하고 기억할 수 있으며, 이는 생존과 환경 적응에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서울 민병원 정광윤 이비인후과 원장은 “인간의 후각 시스템이 단 400개의 수용체만으로 1조 가지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은 효율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후각 정보는 디지털 바코드처럼 조합 부호화되어 뇌에서 해석되기 때문이며, 이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광범위한 화학적 세계를 인지할 수 있게 해준다”라고 강조했다.

후각 상실(Anosmia)과 신경 질환 진단의 연관성
인간의 후각 능력이 1조 가지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후각 상실(Anosmia) 연구의 중요성도 커졌다. 후각 상실은 단순히 냄새를 맡지 못하는 불편함을 넘어,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영양 불균형이나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연구들은 후각 기능의 저하가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 다발성 경화증 등 심각한 신경 퇴행성 질환의 초기 바이오마커로 작용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파킨슨병 환자의 경우, 운동 증상이 발현되기 수년에서 수십 년 전에 이미 후각 기능이 저하되는 현상이 관찰됐다.
이는 후각 신경 경로가 뇌의 감정 및 기억 중추(편도체, 해마)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후각 망울(Olfactory Bulb)이 외부 환경에 노출되는 뇌 조직이기 때문에 신경 퇴행성 변화를 가장 먼저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조 가지의 냄새를 구별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정밀한 후각 테스트는 이러한 질병들을 조기에 진단하고 개입할 수 있는 비침습적인 방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2020년대 들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후각 상실이 주요 증상으로 부각되면서, 후각 기능 평가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됐다. 전 세계적으로 후각 상실 클리닉이 증가하고 있으며, 후각 훈련(Olfactory Training)을 통해 손상된 후각 기능을 회복시키려는 노력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1조 가지의 냄새를 인지하는 인간의 능력을 모방하려는 인공지능(AI) 기반의 ‘전자 코(E-Nose)’ 개발 연구도 가속화되고 있다. 전자 코는 식품 안전, 환경 모니터링, 폭발물 감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후각 수용체 조합 부호화 원리를 인공 신경망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2024년 기준, 일부 첨단 전자 코는 특정 물질을 정밀하게 감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인간처럼 복잡하고 미세한 냄새 혼합물을 1조 가지 스펙트럼으로 구별하는 능력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
후각 건강을 지키는 생활 습관과 연구 전망
인간의 후각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60세 이상 인구의 상당수가 후각 저하를 경험하며, 80세 이상에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아진다. 이 1조 가지의 잠재력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는 후각 건강 관리가 필수적이다. 전문가들은 후각 기능 유지를 위해 코와 부비동의 염증을 관리하고, 규칙적인 후각 훈련을 권장한다. 후각 훈련은 장미, 유칼립투스, 레몬, 정향 등 4가지 기본 향을 하루 두 번, 12주 이상 꾸준히 맡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이는 후각 신경의 가소성을 높여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2023년 발표됐다.
또한, 후각은 뇌의 인지 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냄새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뇌 활성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향신료를 사용하거나, 자연 속에서 새로운 냄새를 맡는 활동 등이 후각 시스템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이다. 후각 연구 분야는 이제 냄새의 질적 분석을 넘어, 냄새가 뇌의 특정 영역에 미치는 영향과 기억 형성 과정을 심층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1조 가지 냄새 구별 능력의 발견은 인간 지각의 경계를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후각을 활용한 비약물적 치료법 개발과 신경 과학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앞으로 후각 기능이 노화 및 질병 예측에 어떻게 더 정밀하게 활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될 전망이다.
김기주 선한빛요양병원 병원장(신경과 전문의)는 “1조 가지 냄새 구별 능력의 발견은 후각 검사의 임상적 중요성을 대폭 높였다. 후각 기능의 미세한 저하 패턴이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 같은 신경 퇴행성 질환의 초기 징후로 나타나기 때문에, 정밀 후각 테스트는 질병 진행을 수년 앞서 예측할 수 있는 비침습적 진단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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