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시체 도둑 그리고 의학 발전의 그림자: ‘시체 도둑’이 활개 친 잔혹한 해부학 시장
19세기 초, 유럽의 주요 도시, 특히 영국에서는 의학 교육의 필수 요소인 해부학 실습을 위한 시신 확보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당시 의과대학의 해부학 수요는 급증했으나, 합법적인 시신 공급은 극도로 제한돼 있었다. 영국 법률은 교수형에 처해진 범죄자의 시신만을 해부용으로 허용했으나, 이는 늘어나는 의대생 수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시체 도굴꾼(Resurrectionists)’이라는 전문 범죄 집단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주로 밤에 공동묘지에 침입하여 갓 매장된 시신을 도굴한 뒤, 이를 의과대학이나 개인 해부학 강사에게 고가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시체 도굴은 런던과 에든버러 등 주요 의학 중심지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졌으며, 이로 인해 서민들의 공포와 분노는 극에 달했다.
시신 도굴 행위는 단순한 재산 범죄가 아닌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됐고, 이는 결국 사회 전체의 치안과 도덕적 기준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1828년 에든버러에서 발생한 ‘버크와 헤어 사건’은 시신 확보를 위한 도굴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며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19세기 초 영국 사회가 직면했던 의학 발전과 윤리적 문제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명확히 보여줬다.

해부학 수요 폭발과 시신 공급의 법적 제한
19세기 초는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특히 해부학은 외과 수술의 기초로서 그 중요성이 강조됐고, 유럽 전역에서 의과대학과 사립 해부학 학교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러나 당시 영국 법률인 ‘살인법(Murder Act)’은 사형수 시신만을 합법적인 해부용 시신으로 규정했다. 이 법은 범죄 억제 목적으로 사형수의 시신을 해부하는 것을 허용했으나, 사형 집행 건수가 감소하면서 시신 공급량은 극도로 줄어들었다.
의과대학들은 해부 실습을 위해 신선한 시신을 필요로 했고, 이는 곧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시신을 확보하려는 수요를 창출했다. 시체 도굴꾼들은 이러한 시장 상황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했다. 도굴된 시신은 상태에 따라 높은 가격에 거래됐으며, 의과대학 측은 연구의 연속성을 위해 이들의 불법 행위를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주로 갓 매장된 시신이 해부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장례식이 끝난 직후 무덤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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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도굴꾼들의 조직적인 활동과 잔혹한 수법
시체 도굴꾼들은 ‘부활자들(Resurrectionists)’이라고 불렸으며, 이들은 단순한 도굴범이 아닌 조직화된 전문 집단이었다. 이들은 공동묘지 주변을 감시하고, 새로 매장된 무덤의 위치를 파악하는 정찰조와 실제 도굴을 실행하는 실행조로 나뉘어 활동했다. 이들의 도굴 수법은 매우 교묘했다. 관 전체를 파내는 대신, 관의 머리나 발 쪽 흙을 파낸 후 지렛대를 이용해 관 뚜껑을 부수고 시신만 꺼냈다.
시신만 훔치고 의복이나 장신구는 그대로 두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는 당시 법적으로 시신 도굴 자체는 중죄가 아니었으나, 부장품을 훔치는 행위는 절도죄로 무거운 처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활동이 기승을 부리자, 서민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무덤 위에 철창을 설치하거나(Mortsafe), 무덤지기를 고용해 밤새도록 묘지를 지키게 하는 등 사회적 비용과 공포가 급증했다. 1820년대 런던에서만 수백 명의 시체 도굴꾼이 활동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도굴을 넘어 살인으로: 버크와 헤어의 충격적인 범죄
시체 도굴 시장의 경쟁이 심화되고 시신 가격이 치솟자, 일부 도굴꾼들은 더 쉽고 안전하게 시신을 확보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1828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발생한 윌리엄 버크(William Burke)와 윌리엄 헤어(William Hare) 사건은 이 어둠의 역사를 상징한다. 이들은 무덤을 파헤치는 대신, 직접 사람들을 살해하여 시신을 확보했다. 이들은 주로 가난한 여행객이나 노숙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버크와 헤어는 1827년 12월부터 1828년 10월까지 약 16명을 살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희생자를 질식시켜 살해했는데, 이는 시신에 외상이 남지 않아 해부학 실습용으로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살해한 시신은 에든버러의 유명 해부학 강사였던 로버트 녹스(Robert Knox) 박사에게 판매됐다. 이 사건이 발각되면서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시체 도굴꾼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헤어는 증언을 대가로 면책됐고, 버크는 1829년 1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1832년 해부학법 제정, 어둠의 시장을 종식시키다
버크와 헤어 사건을 비롯한 시체 도굴 문제의 심각성은 결국 정부의 법적 개입을 촉발했다. 1832년 영국 의회는 ‘해부학법(Anatomy Act 1832)’을 제정했다. 이 법의 핵심은 합법적인 시신 공급 경로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법은 빈민 구제소, 병원, 교도소 등에서 사망한 무연고 시신을 해부학 실습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단, 사망자가 생전에 해부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거나, 48시간 이내에 친척이 시신을 요구하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였다.
이 법 제정 이후, 의과대학들은 안정적이고 합법적인 시신 공급원을 확보하게 됐다. 이에 따라 시체 도굴꾼들이 활동할 경제적 동기가 사라졌고, 불과 몇 년 만에 조직적인 시체 도굴 행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32년 해부학법은 비록 빈민층의 시신을 주로 사용했다는 윤리적 논란을 남겼으나, 19세기 의학 발전에 필수적인 해부학 교육의 기반을 마련하고, 수십 년간 지속됐던 잔혹한 시체 도굴 시장을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 법은 과학적 진보를 위한 사회적 합의와 법적 제도 마련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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