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의대 정원 제로베이스 검토, 의협과 3월 전 협의 방침… 의료계는 실질적 대책 요구하며 반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2026학년도 의대 정원 조정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1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조 장관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의 발언처럼 의대 정원 문제를 ‘제로베이스’에서 논의하겠다”며 기존의 정원 동결·증원·감원 모두를 테이블 위에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침과는 상반된 입장으로, 의료계의 반발을 완화하고자 하는 정부의 태도 변화를 시사한다. 조 장관은 “기존 3058명의 정원에서 동결, 증원, 감원을 모두 포함한 협의를 진행할 것”이라며 3월 전까지 결론을 도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복지부와 의료계, 협의 가능성 열릴까
조 장관은 의료계와의 대화를 재개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하며 “의협 신임 회장이 취임한 만큼, 빠른 시일 내에 협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별도의 설명 자료를 통해 “의대 정원 확대 논의에서 숫자에 얽매이지 않고, 의료계와 유연하게 협의하겠다는 것이 이번 제로베이스 검토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정부의 발표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의 신임 회장인 김택우 회장은 취임식에서 “정부가 단순히 대화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의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의료계와 진정성 있는 협의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계, “구체적인 로드맵 제시하라”
의료계는 정부가 제시한 ‘제로베이스’ 접근 방식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의대 정원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의료계가 당면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명확한 정책 방향”이라며 정부의 자세 변화를 촉구했다.
또한 의대생 및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지난해 발생했던 대규모 휴학 사태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크다. 특히 정부가 교육 인프라 확충이나 교수 채용 등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원 논의를 진행할 경우, 의료계 내부의 혼란이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의대 교수는 “정부가 2026학년도 정원을 논의하기 전에 2025학년도 복귀생과 신입생 7500명의 교육 여건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장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의대 교육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감원 가능성도 논의… 기대와 우려 공존
정부가 의대 정원을 감축할 가능성까지 열어둔 점에 대해 의료계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일부 의사들은 감원이 의료계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단순히 숫자만 줄이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는 최근 회의를 통해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은 최소한으로 증원하거나 기존 정원을 유지해야 한다”며 정부에 공식 입장을 전달했다. 협회는 “향후 정원 조정 문제는 의료계와 정부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협의체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교육 인프라와 의료 인력 문제 해결해야
정부는 의대 정원 조정 논의 외에도 당면한 교육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3월 중으로 각 대학의 교육 여건 조사를 완료하고, 추가적인 교수 채용 및 교육 인프라 확충을 통해 2025학년도 복귀생과 신입생 교육의 정상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러한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지 않을 경우, 의대 정원 논의는 다시 한번 의료계와 정부 간의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2025학년도와 2026학년도 입학 정원이 중첩될 경우, 현장의 교육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원광대 의대, 의평원 평가 탈락… 지방 의대 위기
한편, 의학교육의 질을 평가하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평원)이 최근 발표한 중간평가 결과에서 원광대 의대가 인증유형 변경 판정을 받아 사실상 불인증 상태가 됐다. 원광대는 기존 정원 93명에서 정부의 증원 정책으로 150명으로 늘어났으나, 교육의 질 관리 미흡으로 인해 평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중간평가는 인증을 받은 지 2년이 지난 15개 의대와 의학전문대학원을 대상으로 실시됐으며, 원광대를 제외한 14개 대학은 인증 상태를 유지했다. 의평원은 원광대 의대의 경우 “교육 질 관리 기능이 미흡하다”며 체계적 평가와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원광대 의대는 1년의 유예 기간 동안 개선된 계획을 제출하고 재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통과하지 못할 경우 2026학년도 신입생 모집은 물론 졸업생들의 의사국시 응시 자격도 제한될 수 있다. 과거 서남대 의대가 비슷한 상황에서 폐교된 사례를 떠올리는 수험생과 학부모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원광대 의대 사례는 지방 의대 전반에 걸쳐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기존 정원 대비 10% 이상 증원한 30개 의대는 의평원의 추가 평가 대상에 포함되며, 결과에 따라 인증 탈락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평원의 평가 기준은 의대가 교육 인프라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92개 항목으로 구성되며, 불인증 판정을 받을 경우 심각한 후폭풍이 따른다. 지방 의대 한 학장은 “정원이 두 배로 늘어난 곳은 교육의 질 저하로 인해 불인증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우려를 표했다.
의대 정원 논의의 향방은?
정부가 의대 정원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협의의 문을 열었지만, 의료계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원광대 의대 사례에서 드러난 의대 정원 조정과 교육 질 위기 및 여건 부족 문제는 단순히 숫자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 전반에 걸친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의료계는 정부가 실질적인 협력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협의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결국 2026학년도 의대 정원 문제는 의료계와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협력하느냐에 따라 향방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의대 정원 증원과 감원의 차원을 넘어, 의료계와 정부 간의 실질적인 협력과 교육 인프라 개선을 통해 안정적인 의료 시스템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과연 이번에는 의료계와의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안정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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