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 AI 기반 신약개발 산업화 전략의 현주소와 미래 과제
전 세계 제약·바이오 산업이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만났다. 과거 신약 개발이 연구자의 직관과 지난한 시행착오에 의존했던 ‘경험의 산물’이었다면, 이제는 방대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주도하는 ‘계산의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바이오협회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AI 신약개발 시장은 2024년 18억 6000만 달러에서 2029년 68억 9000만 달러로 연평균 30%에 육박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한국바이오협회가 대전환의 시기에 대국내 바이오 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실질적인 도약을 위한 로드맵을 담은 ‘AI 기반 신약개발 산업화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15일 밝혀 이목이 쏠리고 있다.

파괴적 혁신, 시간과 비용의 장벽을 허물다
전통적인 신약 개발은 평균 10~15년의 기간과 1조 원 이상의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되는 고위험 산업이었다. 1만 개의 후보물질 중 단 1개만이 최종 제품화에 성공하는 0.01%의 확률 게임이기도 했다. 그러나 AI의 도입은 이 견고한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AI는 타깃 발굴부터 후보물질 탐색, 약물 디자인, 전임상 및 임상 연구, 시판 후 안전관리에 이르기까지 전 주기에 걸쳐 개발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실제로 글로벌 바이오테크 기업인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의 사례는 AI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은 AI 플랫폼을 활용해 통상 2~3년이 걸리던 후보물질 발굴 및 검증 과정을 불과 46일 만에 완료했다. 이는 기존 방식 대비 약 15배나 빠른 속도다. 이처럼 AI는 단순한 보조 도구를 넘어, 희귀질환 치료나 개인 맞춤형 의약품 개발과 같이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이 필수적인 분야에서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 잡았다.
AED 사용법 :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리듬을 교정한다
격화되는 글로벌 패권 경쟁, 미국과 중국의 질주
세계 각국은 AI 신약개발을 국가 안보와 직결된 미래 전략 산업으로 규정하고 치열한 속도전에 돌입했다. 미국은 FDA를 중심으로 규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AI와 의료제품’ 백서를 발행하여 규제 접근 방식을 혁신하는 한편, 700조 원 규모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통해 데이터 센터와 클라우드 등 AI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있다. 또한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해 AI 기술의 상용화와 현장 실증을 적극 지원하는 등 민관이 합심하여 기술 패권을 공고히 하는 모양새다.
중국 역시 무서운 기세로 추격 중이다. 중국은 ‘제약산업 디지털 전환 추진계획(2025-2030)’을 통해 AI 신약개발을 공식적인 우선순위로 지정했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 주요 도시는 임상시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AI 기반의 참여자 모집과 자동화된 바이오뱅크 구축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중국 기업들은 다국적 제약사와의 대규모 기술수출 계약을 잇달아 성사시키며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유럽과 일본 또한 AI 법안 제정과 산학 협력 모델을 통해 독자적인 생태계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의 현주소, 양적 성장은 했으나 질적 격차 여전
글로벌 흐름에 발맞추어 한국 정부도 ‘K-바이오·의약품’을 30대 선도 프로젝트에 포함하고 100조 원 규모의 펀드 조성 계획을 발표하는 등 지원 사격에 나섰다. 국내 기업인 JW중외제약, 대웅제약, 신테카바이오 등도 자체 AI 플랫폼을 구축하며 경쟁력 확보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 진단이 뒤따른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논문 발간 수 등 양적인 지표에서는 일정 수준에 도달했으나, 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논문 영향력(RCR) 지표에서는 캐나다, 영국 등에 밀려 5위권에 머물렀다. 특히 AI 신약개발 기술 수준은 선진국 대비 70~80% 수준으로 평가됐다. 특허 출원 점유율은 나쁘지 않으나,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 실질적인 원천 특허가 부족해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기초 체력이 약하다는 지적이다.
데이터 규제 완화와 인재 양성, ‘골든타임’ 사수 전략
보고서는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고 한국형 AI 신약개발 산업화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데이터 활용’과 ‘신뢰성 검증’이다. 신약 개발에 필수적인 대규모 임상·유전체 데이터를 활용하기 위해 ‘데이터 안심구역’ 내에서의 규제 샌드박스를 확대하고, 가명 정보 활용에 대한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AI 모델의 성능을 검증할 수 있는 표준화된 가이드라인인 ‘GMLP(Good Machine Learning Practice)’를 정립해 기업들이 불확실성 없이 개발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인실리코(in-silico, 컴퓨터 시뮬레이션)’ 데이터의 인정 범위 확대다. 현재 신약 허가 과정은 동물실험이나 세포실험 데이터가 주를 이루는데, 검증된 AI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공식적인 증빙자료로 인정하는 단계적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울러 인력 양성 패러다임의 전환도 요구된다. 단순히 AI 기술자나 생물학자를 배출하는 것을 넘어, 두 분야의 언어를 모두 이해하는 ‘바이링구얼(Bilingual) 융합 인재’를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의대·약대 커리큘럼에 데이터 과학을 필수화하고, 현장 중심의 프로젝트 기반 학습을 강화해야 한다.
AI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인프라가 됐다. 한국바이오협회의 제언처럼 R&D에서 사업화, 규제 개선까지 아우르는 범정부 차원의 통합 거버넌스 구축과 과감한 지원 정책이 실행돼야 할 시점이다. 지금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한국 바이오 산업은 글로벌 경쟁의 변방으로 밀려날지도 모른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기사
베놈 vs 포이즌, 치명적 오해의 덫: 생물학적 차이와 과학적 정의, 독(毒)의 전달 방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