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로마의 장군 크라수스 군단 실종 사건: 중국 서부에서 발견된 DNA의 놀라운 증거
로마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 기원전 53년 카르하이 전투 이후, 로마의 거물 장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이끌던 군단의 운명은 수천 년간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파르티아 제국에 대패한 뒤 수만 명의 병력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는데, 이들 중 일부가 동쪽으로 계속 이동해 결국 아시아 대륙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학계의 오랜 논쟁거리였다. 이른바 ‘크라수스의 잃어버린 군단’ 가설은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가설의 핵심적인 단서는 오늘날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외딴 마을 리쳰(驪靬)에서 발견됐다. 20세기 초, 한 서양인 학자에 의해 리쳰이라는 마을 이름이 로마를 뜻하는 고대 중국어 표기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마을 주민들 중 일부가 동아시아인에게서는 흔치 않은 녹색 눈이나 금발 같은 서양인의 외모 특징을 대대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간 진행된 고고학 및 유전학적 조사 결과는 이러한 낭만적인 가설에 과학적인 신뢰성을 더하고 있다. 특히 리쳰 주민들의 유전자 분석 결과, 중동 또는 유럽 혈통의 흔적이 발견됐으며, 이는 이들이 서쪽에서 온 이주민들의 후손일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처럼 고대 로마의 흔적이 실크로드의 동쪽 끝에서 발견됨에 따라, 크라수스가 잃어버린 군단이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고대 역사의 미싱링크를 잇는 중요한 실마리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로마 공화정의 대규모 패전과 병력 행방
크라수스가 이끌던 로마 군단은 기원전 53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파르티아 기병대와 충돌했다. 이 전투는 로마 공화정 역사상 가장 큰 재앙으로 기록됐는데, 약 4만 명의 병력 중 2만 명이 사망하고 1만 명가량이 포로로 잡혔다. 이 패전은 로마의 삼두정치(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포로가 된 1만여 명의 로마 군인들은 파르티아 제국의 동부 국경 지역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이들의 집단적인 행적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로마나 파르티아 문헌에서 사라져 미스터리로 남았다.
잃어버린 군단 가설은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되는데, 파르티아 왕국의 변경 방어를 위해 동쪽 깊숙한 곳, 즉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재배치됐을 가능성이 제시됐다. 고대 로마의 패전 기록을 보면, 당시 로마 병사들은 포로가 된 후에도 집단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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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문헌에 기록된 이질적인 전투 방식
이 실종된 로마 군단의 운명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는 기원전 36년의 고대 중국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흉노족 지도자 질지 선우(郅支單于)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에서 독특한 전투 방식을 구사하는 용병 부대와 맞닥뜨렸다.
한나라의 역사 기록에는 이들이 ‘물고기 비늘 형태’의 진형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 군단 특유의 방어 대형인 ‘테스투도(Testudo, 거북이 등껍질)’와 유사한 형태로 해석됐다. 또한, 이 용병 부대가 목책 대신 토성을 쌓아 이중 방어 구조물을 구축했는데, 이는 서양식 방어 공법의 특징을 보여줬다. 이들이 질지 선우의 휘하에 편입돼 싸웠던 서양계 병사들이며,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나라에 투항하여 리쳰 지역에 정착하게 됐다는 것이 주요 학설이다.

금발, 녹색 눈의 후손: 리쳰 주민들의 유전자 증거
크라수스 군단의 후예로 지목되는 리쳰 마을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진창(金昌)시에 속한다. 이 마을 주민 수백 명을 대상으로 2000년대 이후 집중적인 유전학 조사가 진행됐다. 2005년부터 2007년 사이 중국 란저우 대학(Lanzhou University) 연구팀은 이들 주민의 DNA를 채취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연구 결과, 조사 대상 중 상당수의 미토콘드리아 DNA(mtDNA)에서 중앙아시아 또는 서아시아 계통의 유전자 마커가 발견됐다. 이는 순수한 동아시아 혈통이 아님을 명확히 시사했다.
특히, Y-염색체 분석에서는 유럽 백인에게서 주로 발견되는 유전자형 R1a와 R1b가 혼재되어 나타났다. 이 유전형은 고대 로마인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유럽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며, 로마 군단에 징집된 갈리아, 게르만 출신 보조병들의 흔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유전학적 증거는 리쳰 주민들이 약 2,000년 전 서양 지역에서 이주해 온 집단의 후손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전자가 크라수스 군단 생존자들의 후예임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대 로마 유골 DNA와의 비교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지명 ‘리쳰’과 고대 로마의 언어학적 연결고리
리쳰(驪靬)이라는 마을 이름 자체가 이 가설에 힘을 실어주는 언어학적 근거로 제시됐다. 고대 중국 문헌에서 ‘리쳰’은 로마 제국, 특히 시리아 지역에 위치했던 로마의 속주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이 마을의 일부 전통이나 풍습이 로마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예를 들어, 리쳰 일부 지역에서는 황소를 숭배하거나 투우와 유사한 놀이를 즐기는 문화가 발견됐는데, 이는 고대 로마 문화의 흔적일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유사성은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진 일반적인 동서양 문화 교류의 결과일 수도 있어, 단독적인 증거로서는 확정적인 힘을 가지지 못한다. 최근 학계는 가설의 입증을 위해 리쳰 지역 인근의 고대 무덤 발굴에 집중하고 있다. 흉노족과 한나라의 경계였던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골에서 서양인의 유전자를 확인하고, 그들의 매장 풍습이나 유물이 로마 군단의 것과 일치하는지를 검증하는 작업이 연구의 주요 방향이다. 이러한 연구는 크라수스의 군단이 시공간을 초월해 남긴 역사적 발자취를 명확히 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크라수스의 잃어버린 군단 가설은 고대 로마와 고대 중국 문명 간의 예상치 못한 접점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주제다. 유전학 및 고고학적 증거들이 리쳰 주민들이 서양계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지만, 이들이 직접적으로 기원전 1세기 카르하이 전투 생존자들의 후손이라는 확정적인 결론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고대 DNA의 보존 상태와 대규모 이주 경로의 복잡성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고대 로마 군단병의 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리쳰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골과의 정밀한 비교 분석을 통해 역사적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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