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5월 2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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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는 낙수과 의사가 아닌 외과의사다

어느 외과의사의 목소리, 나는 낙수과 의사가 아닌 외과의사다.

“따르릉”

병원 당직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핸드폰 벨소리에 눈을 떳다.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원무과 당직직원의 전화다.

“원장님, 원무과 아무개입니다. 방금 XX대학병원에서 환자 수술 의뢰가 있습니다. 좀 급해서 2시 15분에 도착한답니다.

순간 ‘나가기 싫다’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단, 1시간 만이라도 따뜻한 내 집에서 편히 누워, 편안한 잠을 자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다. 그러나 난 기계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수술방으로 향한다.

나는 개원한지 벌써 십여년 된 중견 외과병원의 원장이다. 세간에서 흔히들 말하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외과의사다.

대학병원을 박차고 나와 호기롭게 외과병원을 차리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날 보고 미쳤다고 수근거렸다. 요즘 같은 시기에 외과병원을 차린다는 나의 발상이 정말 이해가 안간다는 눈빛이었다. 심지어 사랑하는 내 가족조차 안된다고 날 설득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지만 당시에도 외과의사는 화려했던 과거의 명성은 온데 간데 사라진지 오래였고, 외과로 수련이나 개원은 곧 폭망이라는 사실만이 존재했으니까.

난 그런 말도 안되는 사실을 깨뜨려 보고 싶었다. 개원만 하면, 내가 열심히만 하면 잘 될 것 같았다. 환자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이렇게 간절한데, 환자분들도 이런 내 마음을 충분히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이 모두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기롭게 개원한 외과병원은 정말 파리조차 날지 않을 정도로 한산 그 자체였다. 환자는 없었고, 텅 빈 병원은 침묵만이 가득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직원들 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매월 말이 정말 무서웠다.

눈앞에 수십억에 이르는 대출 빚이 아른 거렸다. 아! 나는 이렇게 신용불량자가 되는구나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앞이 막막했고, 처,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매일 당직을 섰지만, 의학서적은 손에서 놓지 않았고, 틈틈이 수술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렇게 계속 열심히 했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외과의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환자는 조금씩 늘었고, 그렇게 나의 십여년은 손살같이 지나갔다.

지금도 내 삶과 주변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1주일에 2 ~ 3번은 야간 당직을 서야 하고, 쉬는 날도 응급수술환자가 있으면 병원으로 달려와야 한다. 아니 차라리 병원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나는 내 가족의 가장이지만, 내 가족에게 나는 무늬만 가족의 구성원일 뿐이다.

환자는 계속 늘어났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나의 빚 또한 계속 늘어간다. 매월 직원의 월급 걱정도 줄어들지 않았다. 직원이 많아진 탓이겠거니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해보지만 늘어나는 환자에도 불구하고 적자인 병원은 내게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드리워 놓았다.

원가에도 못 미치는 의료수가, 불명확한 의료전달체계, 늘어만 가는 상급종합병원 병상들. 손놓고 있는 정부,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옥죄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매번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외쳐댔지만 꿈쩍도 않고 경증환자를 진료하고, 병상수를 늘려가는 상급종합병원,

지역주민에 대한 본인부담금 할인, 약제비 대납 등 선심성 행정만 일삼는 지역 보건소나 공공의료기관,

매번 환자들을 찾아간다 하며 알맹이만 쏙 빼먹어 버리고, 지역 의료기관 인프라를 망치는 복지부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정책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매번 그런 상황의 반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가 의대정원 2천명 증원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그것도 당장 내년부터라고 한다.

정부는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를 살리겠다고 한다.

정부는 의대정원 2000명 증원을 통해 기피과이자 필수과인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등에서 필수의료 인력이 늘어나는 ‘낙수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했다.

나는 실감했다.

아~ 정부는 나를 낙수과 의사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순간 눈앞이 아득했다. 아무도 안 하려는 외과병원을 개원하여 아등바등 버텨온 지난 십여년의 삶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뭔지 모를 이상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서글픔의 북받침이 끓어올랐다. 나는 왜 외과를 전공했을까? 후회스러웠다.

한 평생을 외과의사로 살아온 내 마음이 이 지경이니 이제 외과를 처음 전공하고 앞으로 한평생 외과로 살아가야 하는 전공의 선생님들과 의대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암담했을까? 얼마나 속상했을까?

외과의사로 살아간다는 것. 많은 각오를 해야 한다.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과정도 녹록치 않고, 의사가 되고 난 후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도 녹록치 않다. 환자를 위해 개인시간도 모두 희생해야 한다.

생각만큼 돈도 많이 못 벌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는 사명감과 돈 보다는 내가 치료하고 수술한 환자가 다 완쾌되어서 걸어서 병실문을 나갈 때의 쾌감으로 살아야 한다.

‘선생님 덕분에 살았어요’라고 감사해 오는 환자분들을 보며 살아야 한다. ‘오늘도 나는 남들에게 이로움이 되는 일을 했구나’라는 즐거움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정부 생각에는 내가 낙수과 의사일 뿐이었다니….

나는 의대정원 증원의 문제점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의사분들이 다 말씀하고 계시니까..

그러나 필수의료를 바라보는 정부의 자세만큼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닌 일선에서 환자의 생명을 위해 희생하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든 필수과 의사들의 생각일 것이다.

나는 정부에게 이렇게 외친다.

정부 관계자님.

“나는 낙수과 의사가 아닙니다. 환자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외과의사입니다”. “부디 그 자존심만은 꺽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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