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여성의 도시 미스터리 추적과 잉카의 인구 구조
안데스 산맥 해발 2,430미터 지점에 위치한 마추픽추는 1911년 7월 24일 예일 대학교의 역사학자 하이럼 빙엄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발견된 이 석조 도시는 잉카 제국의 정교한 건축 기술과 천문학적 지식을 집약한 장소로 평가받는다. 발굴 초기부터 마추픽추는 거주민의 성별 구성과 관련해 고고학계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발굴팀이 수습한 유골들의 대다수가 여성으로 판명되면서 이곳이 여성들만이 거주하던 특수 시설이었다는 가설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기 분석 결과는 마추픽추를 둘러싼 신비주의적 해석을 낳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진행된 재조사 결과는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집는 사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1911년 발굴 당시 제기된 성별 불균형 가설의 배경
하이럼 빙엄은 마추픽추 발굴 과정에서 총 174구의 유골을 수습했다. 당시 골격 분석을 담당했던 조지 이튼은 발견된 성인 유골 중 약 80퍼센트 이상이 여성의 특징을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튼은 유럽인의 골격 기준을 적용하여 골반과 두개골의 형태를 분석했으며, 이를 토대로 마추픽추가 일반적인 도시가 아닌 여성 중심의 공동체였다고 결론지었다. 빙엄은 이 데이터를 근거로 마추픽추가 잉카 제국의 신성한 여성 집단인 ‘아클라(Aclla)’, 즉 ‘태양의 처녀들’이 거주하던 성소였다는 주장을 펼쳤다.
아클라들은 제국 전역에서 선발된 여성들로, 신성한 의식을 수행하고 왕의 의복을 제작하며 폐쇄적인 삶을 살았던 존재들이다. 빙엄은 스페인 정복자들을 피해 잉카의 마지막 혈통과 전통을 보존하려 했던 여성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이 가설은 마추픽추의 지리적 고립성과 결합하여 오랜 기간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남을 도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구원자 콤플렉스, 사실은 낮은 자존감이 보내는 구조 신호다?
현대 법의학 기술이 밝혀낸 유골 성별 판정의 오류
2000년대 초반 툴레인 대학교의 인류학자 존 베라노는 예일 대학교에 보관 중이던 마추픽추 유골들을 재조사했다. 베라노는 100년 전 조지 이튼이 범했던 분석적 오류를 지적했다. 안데스 고산 지대에 거주하던 잉카 남성들은 유럽인에 비해 체구가 작고 골격이 가늘어, 단순히 크기와 섬세함만으로 성별을 구분할 경우 여성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 확인됐다. 베라노 연구팀은 현대적인 법의학 기준과 DNA 분석, 치아 마모도 조사 등을 병행했다.
그 결과 초기 분석에서 여성으로 분류됐던 유골 중 상당수가 남성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종적으로 마추픽추의 유골 성비는 남성과 여성이 거의 대등한 비율로 섞여 있었으며, 영유아와 어린이의 유골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마추픽추가 특정 성별만을 위한 격리된 성소가 아니라, 가족 단위의 인구가 상주하며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던 일반적인 거주지였음을 입증하는 결과다.

동위원소 분석으로 확인된 다민족 복합 거주지의 실체
유골의 치아와 뼈에 축적된 스트론튬 및 산소 동위원소를 분석한 결과, 마추픽추 거주민들의 출신지는 매우 다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분석 데이터에 따르면 거주민들은 마추픽추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아마존 저지대, 태평양 해안가, 그리고 티티카카 호수 주변 등 제국 전역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잉카 제국의 독특한 인구 이동 정책인 ‘미티마에스(Mitimaes)’의 결과로 풀이된다.
잉카 정부는 정복지의 안정과 기술 전파를 위해 특정 지역의 전문가 집단을 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마추픽추는 왕실의 별장이자 행정 중심지로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석공, 농부, 직조공 등 전문 인력들이 가족과 함께 파견되어 정착했다. 유골에서 발견된 다양한 형태의 두개골 변형 풍습과 부장된 도자기 양식의 차이는 이곳이 제국 내 여러 민족이 공존하던 복합적인 사회였음을 뒷받침한다.
천연두 확산에 따른 도시 폐쇄와 역사적 보존 과정
마추픽추가 버려진 원인에 대해서는 전쟁이나 약탈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전염병에 의한 폐쇄설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1530년대 스페인 정복자들이 유입되면서 함께 들어온 천연두는 면역력이 없던 잉카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했다. 마추픽추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거주민들이 급감했으며, 제국 중앙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남은 인원들이 도시를 떠난 것으로 분석된다. 스페인 군대는 마추픽추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잉카 유적들과 달리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도시 내 신전과 주거 구역, 계단식 논인 안데네스는 수백 년 동안 정글 속에 방치됐다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재발견됐다. 현재 마추픽추는 잉카 왕실의 여름 별장이자 종교적 의례 공간으로서의 실체가 과학적으로 규명됐으며, 여성들만의 도시라는 초기 가설은 고고학적 분석 오류가 만들어낸 해프닝으로 정리됐다. 유골 분석을 통해 드러난 다민족적 구성은 잉카 제국이 가졌던 광범위한 통치력과 행정 시스템의 정교함을 보여주는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기사
폭식 뒤의 뇌 과학, 배고픔이 아니라 ‘도파민’이 문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