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가 알코올을 만드는 이유, 크루션 잉어가 “취한 상태”로 겨울을 나는 경이로운 진화
영원히 얼어붙은 호수 밑바닥. 수면을 덮은 두꺼운 얼음 때문에 산소 공급은 완전히 차단됐고, 수온은 영하에 가깝다. 대부분의 어류에게 이곳은 죽음의 공간이다. 산소가 고갈되면 체내에 독성 부산물인 젖산이 쌓여 몇 분 안에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일부 호수에는 이 극한의 겨울을 수개월 동안 버텨내는 불가사의한 생명체가 있다. 바로 크루션 잉어(Carassius carassius)다.
이들은 산소가 완전히 사라진 무산소 환경에서 젖산을 알코올로 변환하는 경이로운 대사 메커니즘을 가동하며 생존한다. 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지구상 생명체가 극한의 환경에 어떻게 적응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진화의 증거로 주목받고 있다.

극한 환경과 저산소증의 위협: 일반 어류의 ‘젖산 지옥’
일반적인 척추동물, 특히 어류는 산소가 부족한 환경에 놓이면 에너지 생산 방식이 유산소 호흡에서 무산소 호흡으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포도당은 최종적으로 젖산으로 분해된다. 젖산은 근육에 축적되면 강한 산성을 띠어 조직을 손상시키고, 결국 생명을 위협하는 독성 물질로 작용한다. 대부분의 물고기는 겨울철 호수가 완전히 얼어 산소가 고갈되는 ‘무산소증(Anoxia)’ 상태가 되면 이 젖산 독성을 견디지 못하고 폐사한다. 특히 북유럽의 얕은 호수나 연못은 겨울이 길고 혹독해 산소 고갈이 흔하게 발생하며, 이는 어류 생존에 가장 큰 위협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크루션 잉어가 수개월 동안 생존한다는 사실은 기존 생물학적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스웨덴 오슬로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크루션 잉어는 산소가 풍부할 때는 일반 어류와 마찬가지로 유산소 호흡을 하지만, 산소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즉시 비상 대사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시스템은 젖산이 축적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이는 생존의 핵심 열쇠로 풀이된다.
알코올 생산 공장: 크루션 잉어의 놀라운 대사 전환
크루션 잉어의 생존 비밀은 독성 물질인 젖산을 무해한 에탄올(알코올)로 변환하는 독특한 효소 경로에 있다. 일반적인 물고기는 무산소 호흡 시 피루브산이 젖산으로 변환되는 반면, 크루션 잉어는 두 가지 특별한 효소, 피루브산 탈탄산효소(PDC)와 알코올 탈수소효소(ADH)를 활용한다. 이 효소들은 피루브산을 아세트알데히드로 변환한 후, 이를 다시 에탄올로 만드는 과정을 촉진한다.
이러한 대사 경로는 효모가 맥주나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발효 과정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크루션 잉어는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 체내에 축적될 수 있는 독성 부산물을 스스로 알코올로 ‘발효’시켜 무력화하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잉어과 중에서도 크루션 잉어와 근연종인 금붕어(Goldfish)에서만 발견되는 매우 희귀한 능력이다. 과학자들은 이들이 진화 과정에서 알코올 대사에 필요한 유전자를 복제하고 변형시켜 이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됐다고 분석한다.

자신을 ‘취하게’ 만드는 생존 전략: 아가미를 통한 알코올 배출
크루션 잉어가 에탄올을 생산하는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에탄올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만약 생산된 알코올이 체내에 계속 축적된다면, 이는 또 다른 독성 물질로 작용하거나 신경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하지만 크루션 잉어는 생산된 에탄올을 혈액을 통해 아가미로 이동시킨 후, 물속으로 효율적으로 배출한다.
이로 인해 호수 밑바닥의 물고기는 수개월 동안 낮은 농도의 알코올에 취한 상태로 겨울을 나는 셈이 된다. 연구에 따르면, 크루션 잉어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합법적인 운전 한도를 초과할 정도로 높게 측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자가 음주’ 전략은 독성 젖산의 축적을 막고, 동시에 부산물인 알코올마저 안전하게 제거함으로써 무산소 상태에서도 대사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한다. 이들은 겨울 동안 대사율을 극도로 낮춰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며, 봄이 되어 얼음이 녹고 산소가 다시 공급될 때까지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화적 기원과 생태학적 의미: 빙하기를 견딘 생존 전문가
크루션 잉어의 이러한 독특한 생존 메커니즘은 지질학적 시간 규모에서 발생한 진화의 압력, 즉 빙하기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해석된다. 빙하기 동안 북유럽의 많은 담수 생태계는 장기간의 혹독한 겨울과 산소 고갈에 시달려야 했다. 이 환경에서 젖산을 효율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종들은 도태됐지만, 크루션 잉어는 알코올 대사 능력을 진화시켜 생존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이 능력 덕분에 크루션 잉어는 포식자가 없는 무산소 호수나 연못을 독점적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산소가 풍부한 환경에서는 경쟁종인 일반 잉어에게 밀리지만, 극한의 겨울 환경에서는 경쟁자 없이 번성하는 생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는 진화가 단순히 최적의 환경에서 가장 강한 개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극한의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틈새 전략’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극한 생존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 생명체의 한계를 넘어서
크루션 잉어의 생존 비밀 연구는 단순한 어류 생태학을 넘어 의학 및 생명공학 분야에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심장마비나 뇌졸중과 같이 산소 공급이 일시적으로 차단되는 허혈(Ischemia) 상황에서 젖산 축적으로 인한 심각한 조직 손상을 겪는다. 만약 크루션 잉어가 사용하는 무산소 환경 적응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다면, 허혈 손상을 최소화하거나 장기 이식을 위한 장기 보존 기술을 혁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작은 물고기는 수백만 년 동안 이어져 온 극한의 자연 선택 속에서 생명의 한계를 재정의했다. 산소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은 지구상의 생명체가 얼마나 놀라운 적응력을 가졌는지 보여주며, 앞으로도 생명 과학 연구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