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미터 소장, 전체 소화기관의 75% 차지하고도… ‘희귀 소화기암’으로 불리는 소장암의 미스터리
인체의 소화기관은 입에서 시작해 항문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터널’이다. 이 중 소장(小腸)은 위(胃)와 대장(大腸) 사이에 위치하며, 전체 소화관 길이의 약 70~80%, 무려 6~7미터에 달하는 길이를 자랑한다. 표면적까지 고려하면 소장의 역할은 더욱 막중하다. 음식물의 소화와 흡수가 90% 이상 일어나는, 그야말로 생명 유지의 핵심 기관이다.
이처럼 광활한 면적과 길이를 가진 소장은 논리적으로 볼 때 외부 발암 물질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 암 발생 빈도가 높아야 마땅하다. 위암이나 대장암이 국내 암 발병률 상위권을 차지하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장에서 발생하는 암, 즉 ‘소장암(Small Intestine Cancer)’은 전체 소화기 암의 1~2%에 불과한 ‘희귀 소화기암’으로 분류된다.
인체에서 가장 긴 장기임에도 불구하고 암의 무풍지대에 가까운 소장. 도대체 소장암은 왜 이토록 드물게 발생하는 것이며, 이 희귀성이 오히려 환자들을 위협하는 ‘진단의 덫’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장의 ‘철벽 방어’, 암을 막는 4가지 비결
전문의들은 소장이 암 발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이유를 크게 네 가지로 분석한다. 이는 소장 고유의 해부학적, 생리학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첫째, 빠른 통과 속도이다. 위에서 잘게 부서진 음식물(미즙, Chyme)은 소장에서 액체 상태로 비교적 빠르게 이동한다. 대장에서 변이 머무는 시간과 비교할 때, 발암 물질이 소장 점막과 접촉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짧다. 접촉 시간이 짧으니 암세포로 변이될 틈 역시 줄어든다는 논리이다.
둘째, 희석된 내용물과 알칼리성 환경이다. 소장의 내용물은 대부분 액체 상태이므로, 음식물에 섞여 들어온 발암 물질의 농도가 낮게 희석된다. 또한, 위에서 내려온 강산성의 미즙은 십이지장에서 췌장액, 담즙 등 알칼리성 소화액과 만나 중화된다. 이러한 알칼리성 환경이 특정 발암 물질의 활성을 저해하거나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셋째, 강력한 면역 체계이다. 소장은 단순히 영양분을 흡수하는 기관이 아니다. 인체 면역 세포의 70% 이상이 장(腸)에 존재하며, 특히 소장에는 ‘파이어판(Peyer’s patch)’이라 불리는 림프 조직이 광범위하게 발달해 있다. 이는 ‘장관 연관 림프 조직(GALT)’의 핵심으로, 외부 유해 물질이나 비정상 세포를 즉각적으로 인지하고 제거하는 1차 방어선 역할을 수행한다. 이 촘촘한 면역 감시망이 암세포의 초기 발생을 효과적으로 억제한다는 것이다.
넷째, 효소의 분비이다. 소장 점막에서는 벤조피렌 수산화효소(Benzopyrene hydroxylase)와 같이 특정 발암 물질을 해독하는 효소가 활발하게 분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담배 연기 속 70종 발암물질: 폐암 넘어 신장, 방광까지 공격하는 치명적 경로
‘침묵의 장기’, 진단이 어려운 이유
이처럼 소장은 천혜의 ‘방어막’을 갖추고 있지만, 일단 암이 발생하면 상황은 돌변한다. 소장암의 희귀성은 역설적으로 조기 진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증상이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소장암의 주된 증상은 복통, 체중 감소, 빈혈, 오심, 구토, 장폐색 등이다. 하지만 이런 증상들은 과민성 대장 증후군, 소화성 궤양, 크론병 등 훨씬 흔한 다른 소화기 질환의 증상과 거의 동일하다. 환자는 물론이고 의료진조차 소장암을 우선적으로 의심하기 어려운 이유다.
진단 장비의 접근성도 문제다. 소장은 ‘소화기관의 암흑대륙’으로 불린다. 일반적인 위내시경(EGD)은 십이지장 일부까지만, 대장내시경은 회장(소장의 끝부분) 말단까지만 접근이 가능하다. 6미터에 달하는 소장의 대부분(공장, 회장)은 기존 내시경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이 사각지대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캡슐 내시경’이나 ‘이중 풍선 소장 내시경(DBE)’과 같은 특수 장비가 필수적이다. 캡슐 내시경은 알약 크기의 카메라를 삼켜 소장 내부를 촬영하는 방식이며, 이중 풍선 소장 내시경은 특수 내시경을 이용해 장을 접어가며 깊숙이 진입하는 정밀 검사다. 하지만 이들 검사는 비용과 시간 소모가 크고 검사 과정이 까다로워, 원인 불명의 출혈이나 극심한 통증 등 명확한 의심 징후가 없는 한 1차 검사로 시행되지 않는다.
서울 민병원 이광원 내과 진료원장(소화기 내과 전문의)는 “소장암은 증상이 모호하고 다른 양성 질환과 감별이 어려워 조기 진단이 매우 까다로운 암”이라며 “환자가 설명하기 어려운 복통이나 빈혈, 체중 감소가 지속될 경우, 일반적인 위·대장 내시경에서 원인을 찾지 못했다면 소장 질환, 특히 ‘희귀 소화기암’인 소장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캡슐 내시경이나 소장 내시경 같은 정밀 검사를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양한 얼굴의 소장암, 위험 인자는?
소장암은 단일 질환이 아니다. 발생하는 세포의 종류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점막 상피세포에서 기원하는 ‘선암(Adenocarcinoma)’이 가장 흔하며, 주로 십이지장에서 발견된다. 다음으로는 신경내분비세포에서 발생하는 ‘유암종(Carcinoid tumor, 신경내분비종양)’, 림프 조직에서 생기는 ‘림프종(Lymphoma)’, 그리고 장벽의 근육이나 결합 조직에서 기원하는 ‘위장관 기질 종양(GIST, 육종)’ 등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만큼이나 위험 인자도 산재한다. 소장암 발병률을 높이는 가장 강력한 인자는 ‘만성 염증’이다. 특히 크론병(Crohn’s disease) 환자는 일반인에 비해 소장암(주로 선암) 발병 위험이 수십 배까지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된다. 또한, 글루텐 불내증으로 인한 만성 염증 질환인 셀리악병(Celiac disease) 역시 소장 림프종의 위험을 높인다.
이 외에도 ‘가족성 선종성 용종증(FAP)’이나 ‘포이츠-예거 증후군(Peutz-Jeghers syndrome)’과 같은 유전성 용종 증후군이 있는 경우, 소장암 발병 위험이 현저히 높아지므로 정기적인 소장 검사가 권고된다.
희귀암 극복의 열쇠, 수술과 다학제 접근
소장암의 치료는 암의 종류, 위치, 병기에 따라 결정되지만, 가장 근간이 되는 치료법은 ‘수술적 절제’이다. 암이 발생한 소장 부위와 주변 림프절을 광범위하게 절제하는 것이 표준 치료다.
문제는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아, 발견 당시에 이미 주변 장기로 침윤했거나 다른 장기로 원격 전이된 3, 4기 환자의 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이 경우 수술만으로는 완치를 기대하기 어려워 항암화학요법이나 방사선 치료, 표적 치료 등 전신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특히 소장암은 유형별로 치료 반응이 판이하게 다르다. GIST의 경우 특정 유전자(c-KIT) 돌연변이를 표적으로 하는 표적 치료제(이매티닙 등)가 극적인 효과를 보이지만, 선암이나 유암종은 사용하는 항암제가 다르다. 따라서 소화기내과, 외과, 종양내과, 영상의학과, 병리과 전문의가 한자리에 모여 환자의 상태를 논의하는 ‘다학제 진료’가 필수적이다.
홍성수 비에비스나무병원 병원장(소화기 내과전문의)는 “소장암은 희귀하기 때문에 대규모 임상 연구가 다른 암종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최근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GIST나 림프종 등 특정 유형의 소장암에서는 효과적인 표적 치료제가 개발되어 생존율이 향상되고 있다. 희귀암일수록 정확한 조직학적 진단과 유전자 변이 분석을 바탕으로 한 개인 맞춤형 치료 전략을 수립하는 다학제적 접근이 환자의 예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소장은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며 강력한 방어 기제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견고한 성’이다. 하지만 그 견고함과 희귀성이라는 장막 뒤에 숨어, 일단 발생하면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것이 바로 ‘희귀 소화기암’ 소장암의 두 얼굴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복부 증상이 지속된다면, ‘나는 아닐 것’이라는 안일함 대신 이 ‘침묵의 장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기사
단두대 기요틴 잔혹함의 상징? 사실은 사형수 고통 줄이려던 ‘인도주의’ 발명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