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진을 범죄자로 만드는 사회, 필수 의료 기피 가속화, 법과 제도의 현실적 개선이 시급하다
최근 법원의 한 판결이 의료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데이트폭력 피해자로 응급 치료를 받던 환자가 사망한 사건에서, 재판부는 이를 담당했던 1년 차 전공의에게도 공동 배상 책임을 부여했다. 응급 상황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의료진이 폭력 가해자와 동일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의료 소송 판례를 넘어 대한민국 필수 의료의 근간을 뒤흔드는 결정이며, 앞으로 의료진들이 응급 환자 치료를 기피하게 만드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법원은 중심정맥관 삽입 과정에서 발생한 출혈을 과실로 판단했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해당 시술이 필연적으로 일정한 위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응급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공간이다. 환자가 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며, 의료진은 순간적인 판단과 신속한 조치로 생명을 구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발생하는 불가항력적 의료 사고를 개인의 과실로 몰아가는 것은, 결국 의료진에게 응급 처치를 주저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사안을 단순히 개별 사건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응급 의료 분야는 현재도 기피 현상이 심각하다. 외과, 소아과, 응급의학과 등 필수 의료 분야는 전공을 희망하는 젊은 의사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정부의 지원 정책만으로는 이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만약 이번 판결처럼 의료진이 언제든 법적 책임을 지고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필수의료 분야로 지원하는 의사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의료진이 사법적 위험을 감수하며 응급 의료를 지속할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법조계와 사회가 의료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의료진을 신과 같은 존재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결과를 완벽하게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응급 의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처치는 신속성과 정확성이 동시에 요구되는 고도의 기술적 작업이다.
그러나 의료 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판결처럼 희귀한 의료 합병증이 발생할 경우 이를 의사의 과실로 몰아간다면, 응급실에서 과감한 치료를 시도할 의료진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법원은 의료진을 법의 잣대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이루어지는 의료 행위는 일반적인 상황과 다르다. 우리는 법원이 의료 현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판결은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에 미치는 파급력이 매우 클 것이며, 필수 의료 분야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
정부 역시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필수 의료 인력 부족을 해결하겠다며 의대 정원 확대만을 논의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정작 의료진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마련되지 않았으며, 젊은 의사들이 필수 의료 분야에서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의료사고특례법 제정, 의료 분쟁 조정 제도의 개선, 응급 의료 인력 보호 방안 마련 등 실질적인 대책이 시급하다.
의료진이 마음 놓고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응급 의료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의료진을 공범으로 만드는 사회에서 환자들이 과연 안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사회와 법원이 깊이 고민해야 할 때다.

[추천기사]
응급 의료진 보호 대책 마련 시급… 의료계, 법원 판결에 우려 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