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가 과거에만 갇혀 지내는 이유, 상황에 맞는 기억 선별하는 뇌 속 신경망 연결 구조와 기능 확인
현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과학과 한진희 교수 연구팀은 뇌가 수많은 정보 중에서 현재 상황에 가장 적절한 기억을 선택적으로 불러오는 특정 신경회로를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고 17일 밝혔다. 이번 연구 성과는 치매나 인지장애 환자들이 과거 기억에만 머물러 있고 최신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을 규명했다는 점에서 학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연구진은 기억의 형성뿐만 아니라 저장된 기억 중 무엇을 꺼내 쓸지를 결정하는 ‘신경 스위치’의 존재를 확인하며 뇌 과학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내측중격과 내측내후각피질 잇는 연결 회로 확인
연구팀이 주목한 부위는 뇌 중심부 앞쪽에 위치한 내측중격(Medial Septum)과 귓구멍 깊숙한 곳의 중앙부에 위치한 내측내후각피질(Medial Entorhinal Cortex)이다. 내측중격은 뇌에서 기억을 형성하고 집중력을 조절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사람의 미간에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지점에 위치한다. 반면 내측내후각피질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하여 해마로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이 두 영역은 기억 저장 장치인 해마와 인접해 있으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한진희 교수팀은 이 두 영역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신경세포 다발에 집중했다. 이 회로는 약 5cm 내외의 길이를 가진 휘어진 형태의 신경 구조물로, 마치 두 지점을 잇는 물리적인 케이블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연구진은 이 케이블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뇌가 비로소 수많은 기억 데이터 중에서 현재 상황에 필요한 최신 기억을 정확하게 골라내어 의사결정에 활용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기억의 저장만큼이나 저장된 데이터의 선별적 인출이 지능적인 활동에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최신 정보를 선택하는 신경 스위치 역할 입증
기존 뇌 과학에서는 기억이 어떻게 저장되고 인출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으나, 이번 연구는 경쟁하는 여러 기억 사이에서 선택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을 규명했다는 점에 차별성이 있다. 뇌는 고정된 정보를 단순히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환경 변화에 맞추어 기존 기억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정보와 대조하는 과정을 거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내측중격에서 내측내후각피질로 이어지는 신경회로는 이 과정에서 최신 기억을 우선순위에 두도록 만드는 ‘신경 스위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해당 회로가 활성화되면 뇌는 과거의 낡은 정보보다는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된 유효한 정보를 선택하여 추론과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만약 이 연결 고리에 문제가 발생하면 뇌는 정보의 최신성을 판별하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습관이나 기억에만 의존하게 되어 비합리적인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연구진은 이러한 기능적 단절이 치매 환자가 보이는 인지적 고착 상태의 핵심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실험을 통한 기억 선택 메커니즘 검증
연구팀은 생쥐를 이용한 행동 실험을 통해 이 회로의 실질적인 역할을 입증했다. 먼저 강한 갈증을 느끼는 생쥐에게 갈림길에서 왼쪽 방을 선택하면 물을 마실 수 있다는 학습을 시켰다. 생쥐는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왼쪽 방에 물이 있다’는 강력한 기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연구팀은 상황을 변경하여 동일한 왼쪽 방에 들어갔을 때 물 대신 전기 충격이라는 부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이는 기존의 보상 기억을 덮어쓰는 최신 정보다.
실험 결과, 신경회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생쥐는 전기 충격을 받은 최신 기억을 즉각적으로 소환하여 더 이상 왼쪽 방에 진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내측중격과 내측내후각피질 사이의 회로를 차단한 생쥐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해당 생쥐는 방금 겪은 전기 충격의 고통보다 과거에 물을 마셨던 즐거운 기억에 의존하여 계속해서 왼쪽 방을 선택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는 신경회로가 끊길 경우 최신 상황에 맞는 판단이 불가능해짐을 시사한다.
퇴행성 뇌질환 치료의 새로운 전제 제시
이번 연구 결과는 알츠하이머와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알츠하이머 초기 단계에서 가장 먼저 손상되는 부위 중 하나가 바로 이 신경회로가 포함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치매 환자들이 과거의 일은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방금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거나, 주변 환경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의 행동 패턴에 갇히는 현상이 이 회로의 기능 상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번 연구로 뒷받침되었다.
연구를 주도한 한진희 교수는 뇌가 수많은 경험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정리하고, 그중에서도 현재 상황에 가장 유용한 정보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원리를 규명한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현재 이 연구는 특정 신경회로를 인위적으로 활성화하는 기술을 통해 과거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정보를 정상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치료 전략 수립의 근거로 활용될 전망이다. 이는 인지장애 개선을 위한 약물 개발이나 정밀한 뇌 자극 치료의 핵심 타깃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