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를 높여도 필수의료가 망한다, 상대가치점수 체계의 숨겨진 모순과 구조적 한계
우리나라 의료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필수의료가 고사 직전에 내몰렸다. 흉부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생명과 직결된 분야에서 의료진이 이탈하고 병원 문이 닫히는 현상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러한 인력 쏠림 현상의 이면에는 ‘돈’의 문제를 넘어, 의료 행위의 가치를 매기는 근본적인 잣대인 ‘상대가치점수제도’의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의료 행위의 난이도와 위험도, 숙련도를 공정하게 반영하겠다며 도입된 이 제도가 오히려 필수 의료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칼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직면한 이 구조적 모순을 면밀히 추적해 보면, 정부가 내놓은 개혁안들이 왜 현장에서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는지 그 진실이 드러난다.

낡은 잣대에 갇힌 생명의 가치
상대가치점수는 의료 업무량, 인력 및 시설 장비 등 자원 소모량, 그리고 위험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된다. 하지만 이 산정 방식 자체가 필수의료에 불리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이 근본적인 문제다. 소모되는 자원의 양이 측정하기 쉬운 검사나 시술 위주의 진료과는 점수가 높게 책정되는 반면, 고도의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가시적인 자원 소모가 적은 상담이나 수술 등은 저평가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를 돌보는 필수의료 분야는 대기 시간, 감정적 소모, 잠재적인 의료 소송 위험 등이 점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이러한 불균형은 결국 ‘수익성’이라는 경제 논리로 이어져 병원들이 필수의료 인력을 줄이고 돈이 되는 진료과목에 집중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부와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이러한 지적을 수용하여 현재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과거 5~7년 주기로 굼뜨게 진행되던 상대가치 개편 작업을 ‘연차별 수시 개편 체계’로 전면 개편한 것이 그 핵심이다. 의료 현장의 빠른 변화에 맞춰 고평가된 항목은 신속히 깎고, 저평가된 필수의료 항목은 즉각 올려주는 유연한 대응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그동안 고착화된 수가의 왜곡을 바로잡겠다는 선언과도 같지만, 현장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하다. 단순히 점수를 조정하는 속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이미 붕괴된 필수의료의 근간을 세우기에 역부족이라는 비판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공공정책수가라는 이름의 임시방편
정부가 내세운 또 다른 카드는 ‘공공정책수가’의 대대적인 확충이다. 소아 아동 병원, 분만실, 24시간 중증 응급센터 등 필수 인프라를 유지하는 기관 자체에 보상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개별 의료 행위마다 점수를 매기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필수 시설을 ‘유지’하는 행위 자체를 가치로 인정하겠다는 취지다. 이는 분만실이 없어 산모가 길 위에서 아이를 낳거나, 소아과 오픈런이 일상이 된 비정상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평가받는다. 정부는 이를 통해 인프라 붕괴를 막고 의료진에게 최소한의 운영 동력을 제공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수가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땜질식 처방’에 불과하다. 공공정책수가는 말 그대로 특정한 목적을 위해 한시적으로 지급되거나 조건부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의료진에게 장기적인 안정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현장의 의료진들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가산금이나 정책 수가에 기대어 생명을 거는 직업적 자긍심을 유지하기는 힘들다”고 토로한다. 더욱이 이러한 수가의 혜택이 실제 일선에서 고생하는 전공의나 전문의들의 처우 개선으로 직결되지 않고 병원의 경영 적자를 보전하는 데 그치고 있다. 보상 체계의 말단까지 정책의 효과가 도달하지 않는 구조적 단절이 존재하는 셈이다.

총점고정의 굴레와 제로섬 게임의 비극
가장 치명적인 진실은 ‘총점고정(Budget Neutrality)’ 원칙에 숨어 있다. 이는 의료 수가의 총액을 정해두고, 특정 항목의 점수를 올리면 반드시 다른 항목의 점수를 깎아야 하는 구조다. 현재의 상대가치점수제는 이 원칙 아래 운영되고 있다. 즉, 필수의료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파이를 뺏어와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다. 정부가 필수의료 강화를 위해 수천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고 홍보하지만, 총점고정이라는 견고한 벽에 부딪히는 순간 이 예산은 기존 의료 자원의 재배분 수준에 그치게 된다. 이는 의료계 내부의 직역 간, 과목 간 갈등을 부추기는 교묘한 장치로 작동한다.
이 총점고정 원칙이야말로 필수의료 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임이다. 의료 행위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물가가 상승하며 의료 기술이 발전해도, 전체 파이가 고정된 상태에서는 필수의료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 확대’는 불가능에 가깝다. 정부가 ‘연차별 수시 개편’을 통해 필수의료 항목을 올려준다고 해도, 그 재원은 결국 다른 필수의료 항목이나 일반 진료 항목에서 깎아낸 점수에서 나온다. 이러한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의 정책은 결국 의료 현장의 하향 평준화를 불러올 뿐이다. 총점고정을 전제로 하는 상대가치점수제 고유의 한계가 극복되지 않는 한 개혁은 이뤄질 수 없다.
진정으로 필수의료를 살리고자 한다면, 이제는 눈가림식의 점수 조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대가치점수제라는 낡은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의료 가치의 척도를 재설계하는 과정에서 ‘총점’이라는 족쇄를 풀고, 국가 재정의 과감한 투입을 전제로 한 ‘플러스 섬(Plus-sum)’ 체제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생명을 지키는 행위가 더 이상 경제적 희생을 강요받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현재 벼랑 끝에 선 필수의료를 구하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시스템의 모순을 감추고 의료진의 헌신만을 강요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왜곡된 가치의 저울을 바로잡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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