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 환자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변형된 주치의제를 강행하는 것
지난 8일 보건복지부는 일차의료 강화를 목적으로 추진하는 「지역사회 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의 참여기관 공모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복지부가 발표한 이번 시범사업 계획은 인구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에 대응하여 동네 의원을 중심으로 환자들에게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마련됐다.
보건복지부 공모 자료에 따르면, 참여 의료기관은 환자의 건강 위험도와 중증도를 고려해 맞춤형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정부는 이 과정에서 참여 의원들이 기존의 행위별수가제 외에도 환자의 위험도에 따라 일정액의 보상을 정기적으로 지급받는 통합수가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했다.
또한 복지부는 시범사업의 실효성을 검증하고 참여 기관의 지속적인 환자 관리 성과를 측정하기 위한 지표로 타 의원 이용 비중을 의미하는 ‘유출률’을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부는 이번 공모를 시작으로 지역 의료 생태계를 혁신하고 고령층의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지난 9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지역사회 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 참여기관 공모 계획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이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대한의사협회, 명확한 정의와 사회적 합의 없는 주치의제 도입 반대
의협은 이번 시범사업이 현재 정부가 구상하는 방식대로 추진될 경우, 본래 취지인 일차의료 강화는커녕 기존의 의료전달체계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의협은 현재 우리나라 의료 환경에서 주치의제에 대한 명확한 학술적, 정책적 정의는 물론이고 국민적 차원의 사회적 합의조차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시범사업은 자칫 정부가 의도한 특정 형태의 변형된 주치의제 모델을 고착화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의협은 지적했다. 더 나아가 시범사업의 세부 내용을 분석한 결과, 환자 인두제적 요소와 위험도별 월정액 지급이라는 보상 구조가 포함돼 있어 의사들의 진료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라고 의협은 주장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의료비용 통제와 환자의 의료 이용 억제에만 초점이 맞춰진 정책이며, 장기적으로는 환자의 자유로운 의료 선택권을 크게 위축시킬 것이라고 의협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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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당연한 의료 선택권을 제한하는 유출률 성과지표
이어 의협은 보건복지부가 시범사업의 핵심 성과지표 중 하나로 타 의원 이용 비중을 뜻하는 ‘유출률’을 포함시킨 것에 대해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의협은 환자는 자신의 질환 특성과 중증도에 맞춰 동네 의원, 지역 전문 단과의원, 종합병원, 상급종합병원 등 가장 적절한 의료기관에서 최선의 진료를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당뇨병 환자가 합병증 관리를 위해 안과 진료를 받거나 심부전 환자가 정밀 검사를 위해 심장내과 진료를 받는 등 타 전문 진료가 필요한 경우 지역 전문 단과의원으로 환자를 의뢰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고 필수적인 의료전달체계의 작동이라고 의협은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부가 이러한 정상적인 진료 의뢰 과정을 이른바 ‘유출’이라는 부정적 프레임으로 평가하는 것은 의료전달체계의 기본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의협은 비판했다.
아울러 의협은 정부가 유출률을 성과지표로 강제할 경우, 일선 의료기관들이 지표 관리를 위해 환자의 타 기관 방문을 꺼리게 돼 결과적으로 환자의 의료기관 선택권이 부당하게 제한되고 의원 간의 협력 및 의뢰·회송 체계가 심각하게 위축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해당 지표의 즉각적인 폐기를 요구했다.

통합수가제 도입이 초래할 과소진료 및 의료 질 저하 우려
시범사업에 포함된 보상 체계와 관련해서도 의협은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다. 복지부의 공모 자료에 따르면, 시범사업 참여 의원에 대한 진료서비스 보상은 기존의 행위별수가제와 새로운 통합수가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에 대해 의협은 통합수가제 도입에 명확하고 단호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의협은 환자의 위험도에 따라 사전에 정해진 월정액을 지급하는 통합수가제가 결국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한정된 보상 범위 안에서만 진료를 수행하도록 유도하는 기전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의사가 환자에게 꼭 필요한 검사나 적극적인 처치를 시행할수록 의료기관이 떠안아야 할 재정적 부담이 비례해서 증가하는 불합리한 구조라는 것이다.
의협은 이러한 보상 구조가 의료기관에 비용 절감을 압박해 꼭 필요한 진료조차 축소하게 만드는 ‘과소진료’를 광범위하게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의협은 과소진료의 만연이 결국 환자에게 제공되는 필수 의료서비스의 위축으로 이어져 전반적인 의료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리고, 오랫동안 쌓아온 환자와 의사 간의 굳건한 신뢰 관계마저 무너뜨릴 것이라고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 메디케어 위험조정 제도의 섣부른 국내 차용 문제
더불어 의협은 이번 시범사업에서 환자의 위험도를 평가하기 위해 도입하려는 HCC(Hierarchical Condition Category) 모델의 부적절성을 강력히 꼬집었다. 의협의 설명에 따르면, HCC는 원래 미국의 메디케어(Medicare) 제도 하에서 민간 의료보험사들이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가입자만을 선호하고 중증 질환자나 고위험군 환자의 가입을 기피하는 이른바 ‘역선택’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위험조정 제도다.
의협은 이처럼 철저히 미국식 민간 보험 환경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개발된 제도를 공적 건강보험 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일차의료기관 진료비 수가 산정 방식에 그대로 덧씌우는 것은 제도의 성격과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의협은 보건복지부가 국내 의료 현실과 건강보험 체계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해외의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차용하여 시범사업의 보상 구조를 설계했다고 지적하며, 이는 향후 의료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심각한 부작용과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경고했다.
일방적 추진 중단 및 합리적인 방향의 제도 재설계 촉구
끝으로 의협은 일차의료 혁신이라는 중대한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정부의 일방적인 불통 행정을 규탄하며 전면적인 재검토를 촉구했다. 이를 위해 의협 산하 의료정책연구원은 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주치의제도 연구 동향, 쟁점과 과제」를 주제로 조만간 내부 긴급 토론회를 개최하여 관련 쟁점들을 전문가들과 함께 심도 있게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의협은 복지부가 주치의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 정립과 제도적 방향성에 대한 범사회적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현시점에서, 과소진료를 유발하는 통합수가제와 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유출률 성과지표를 강행하는 시범사업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협은 또한 국민의 건강권과 직결된 일차의료 제도의 개편은 결코 정부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식으로 진행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의협은 보건복지부를 향해 지금이라도 당장 의료계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충분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환자와 의료인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제도를 완전히 재설계할 것을 다시 한번 강력히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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