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호트 분석 결과 한국인 전두측두엽치매 서양과 다르다는 임상적 특성 최초 규명
서구의 진단 기준에만 의존해왔던 치매 진단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 중요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비교적 젊은 50~60대에 발병해 환자와 가족에게 큰 고통을 안기는 ‘전두측두엽치매(FTD)’가 한국인에게서는 서양인과 뚜렷하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기존의 국제 진단 기준을 한국인 환자에게 그대로 적용할 경우, 오진이나 진단 지연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은 ‘뇌질환 연구기반 조성 연구사업(BRIDGE)’의 일환으로 구축된 한국인 조발성 치매환자 코호트(LEAF) 자료를 정밀 분석한 결과, 한국인 전두측두엽치매 환자의 임상 증상이 서양 환자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서양 기준으로는 놓칠 수 있는 ‘한국형 치매’
전두측두엽치매는 알츠하이머병과 달리 기억력 저하보다 성격 변화, 감정 둔화, 언어 기능 저하가 먼저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번 연구가 주목한 ‘우측 측두엽변이 전두측두엽치매(rtvFTD)’는 익숙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감정 반응이 사라지는 증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 유형에 대한 국제적으로 통일된 진단 기준이 부재했으며, 주로 서양 환자를 대상으로 개발된 기준을 차용해 왔다.
연구진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진단 트리(ADT)’와 미국 UCSF의 ‘sbvFTD’ 등 서양의 대표적인 진단 기준 두 가지를 한국인 환자 225명(행동변이 전두측두엽치매 138명, 의미변이 원발성 진행성 실어증 87명)에게 적용해 검증했다. 그 결과, 서양의 진단 기준이 한국인 환자를 정확히 가려내는 데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서양의 진단 기준인 ADT는 얼굴 인식 장애와 함께 기억력 저하, 우울증을 주된 증상으로 꼽는다. 또한 미국 UCSF 기준은 공감 능력 감소와 강박적 사고를 주요 특징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한국인 환자들에게서는 이러한 서양식 전형성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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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못 알아보고 참지 못하는 ‘탈억제’ 두드러져
분석 결과, ‘얼굴 인식 장애(프로소파그노시아)’는 서양인과 한국인 환자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 증상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동반 증상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발견됐다. 서양 환자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기억장애, 우울증, 공감 능력 저하, 강박적 사고 등은 한국인 환자에게서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났다.
반면, 한국인 환자들은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언행을 하거나 충동적인 행동을 참지 못하는 ‘탈억제’ 증상이 서양 환자에 비해 훨씬 빈번하게 관찰됐다. 즉,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면서 화를 참지 못하거나 충동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 한국형 전두측두엽치매의 독특한 패턴인 셈이다.
이러한 임상적 차이는 뇌 영상 분석에서도 뒷받침됐다. MRI 분석 결과, 한국인 환자들은 얼굴 인식 기능과 밀접하게 관련된 뇌 영역인 우측 측두엽 및 ‘방추회(fusiform gyrus)’ 부위의 위축 패턴이 뚜렷하게 관찰됐다. 방추회는 뇌의 측두엽과 후두엽 사이 아랫부분에 위치하며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핵심 영역이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부산대학교병원 신경과 김은주 교수는 기존 진단 기준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했다. 김 교수는 “한국인 환자의 임상 표현 양상과 문화적 행동 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기존의 서구 중심 국제 기준만으로는 우측 측두엽변이 전두측두엽치매를 조기에 정확히 구분해 내기 어렵다”고 설명하며, “오진을 줄이고 조기 치료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특성을 반영한 새로운 진단 기준 마련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뇌질환 국가 코호트 연구, 임상 현장의 지도가 되다
이번 연구 성과는 단순한 학술적 발견을 넘어, 국가 주도로 구축된 대규모 환자 데이터(코호트)가 실질적인 질병 진단 기준 검증에 활용된 첫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국립보건연구원은 2021년부터 전국의 주요 병원과 협력하여 발병 나이가 만 65세 이전인 조발성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을 장기간 추적하는 코호트 연구(LEAF)를 진행해 왔다.
연구진에 따르면, 서양의 ADT 기준을 한국 환자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할 경우, 얼굴 인식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력 저하나 우울증이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전두측두엽치매가 아니라고 분류될 위험이 있다. 이는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Alzheimer’s & Dementia’에 게재되며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국립보건연구원 고영호 뇌질환연구과장은 “가족이나 지인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거나 감정 표현이 둔해지는 변화를 단순히 나이 탓이나 성격 변화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며 “이러한 변화가 치매의 초기 신호일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하며, 앞으로 한국인의 임상 양상을 정밀하게 반영한 새로운 진단 기준 개발을 위해 연구를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질병관리청은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뇌질환 연구기반 조성 연구사업(BRIDGE)을 더욱 고도화할 방침이다. 흩어져 있는 뇌질환 연구 자원을 통합하고, 임상 정보와 뇌 영상, 유전체 데이터를 표준화하여 연구자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이 사업은 향후 한국형 치매 정밀 의료 실현의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양과는 다른 한국인만의 뇌질환 지도가 점차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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