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 500년, 고구려 계승, 강력한 중앙집권, 무신정권, 몽골과의 전쟁까지—고려의 영광과 시련
Ⅰ. 고려의 건국과 자주적 통일국가의 수립
고려는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이 건국한 왕조로, 후삼국을 통일하며 민족의 재통합을 이루었다. 936년 후백제까지 정복하면서 한반도를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묶어내었으며, 고구려 계승을 강조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들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혼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사심관 제도를 도입하여 지방 통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또한, 북진 정책을 통해 여진과 거란의 위협에 대비하는 한편, 발해 멸망 이후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민족의 포용성을 높였다.
태조의 뒤를 이은 성종(981~997년) 대에 들어서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국가 운영의 중심으로 삼아 중앙집권 체제를 한층 더 강화했다. 그는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불교 중심에서 유교 중심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과거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문신 관료를 양성했다.
지방에는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국가 행정 체계를 정비하며 체제 안정에 힘썼다. 이와 함께 국자감을 정비하여 교육 체제를 확립하고, 농업 장려 정책을 통해 경제 기반을 다지는 등 고려 왕조의 기틀을 완성했다.

Ⅱ. 거란 및 여진과의 대립 속 고려의 외교와 군사 정책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 강대국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거란(요)과 여진(금)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고려는 외교와 군사적 대응을 병행해야 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고려는 서희를 파견하여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 국가이며, 거란과 적대적인 송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고 설득하여, 오히려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거란은 고려가 송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1010년(현종 1년), 1018년(현종 9년) 두 차례 더 침입했다. 특히 1019년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대파하면서 고려는 자주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맺고 북방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국방력을 증대시켰다.
12세기 들어 여진족이 강성해지면서 고려의 대외 관계는 또 한 번 변화를 맞았다.
고려는 윤관을 중심으로 별무반을 조직하여 1107년 동북 9성을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후 여진이 더욱 강대해지고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고려는 현실적인 판단 아래 금과 사대 관계를 맺으며 외교적인 타협을 선택했으나, 이는 고려 내부에서 자주성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강력한 군사적 대응과 외교 전략을 병행하면서도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Ⅲ. 문벌 귀족 사회의 발전과 무신정변
고려 중기에는 문벌 귀족들이 정치와 경제적 권력을 장악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시기를 맞이했다. 이들은 과거제를 통해 관직을 세습하며 중앙 정치를 장악했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적 기반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이들의 권력 독점과 향락적인 생활은 사회적 불균형을 초래하였으며, 특히 하층 군인과 농민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었다.
1170년, 문신 중심의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을 중심으로 무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약 100년간 무신들이 실권을 행사하며 고려의 정치 구도가 급변했다.
이의민, 최충헌, 최우 등 강력한 무신들이 정권을 이어받아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통치를 이어갔으나, 이 과정에서 권력 투쟁과 민중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무신 정권 시기에 농민과 천민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1198년 망이·망소이의 난, 1237년 이연년의 난 등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했으며, 이는 고려 사회가 점차 내부적으로 붕괴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결국 무신 정권은 내부의 갈등과 외부의 몽골 침략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점차 쇠퇴해 갔다.

Ⅳ. 몽골의 침략과 고려의 항쟁
13세기 초,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면서 고려에도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몽골의 조공 요구를 거부하며 맞섰지만, 결국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입은 고려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몽골은 1259년까지 총 8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으며, 이에 고려는 최씨 정권의 주도 아래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 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몽골의 공세는 점차 강해졌고, 고려의 주요 도시와 사찰들이 불타는 등 피해가 극심해졌다. 특히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고, 많은 백성이 학살당하는 등 국토는 유린되었다. 이에 고려는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270년 개경 환도를 결정하면서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는 조건으로 항쟁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고려는 원의 간섭 속에서도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충렬왕은 국왕의 권위를 유지하는 한편, 원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독자적 문화를 지키려 하였다.
또한, 공민왕(1351~1374년)은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며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 등 고려의 독립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고려는 500년 동안 외세의 압박과 내부의 혼란 속에서도 자주적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태조 왕건의 통일과 중앙집권화, 거란과 여진을 상대로 한 군사·외교적 대응, 문벌 귀족과 무신 정권의 부침, 그리고 몽골과의 대립까지 고려는 끊임없는 도전과 적응을 반복했다. 결국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으며 점차 쇠퇴했지만, 동시에 독립을 향한 의지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왕조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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쏨작가의지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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