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진단의 첫 관문 조직 채취, 초기 고정 단계의 정밀 공정
현대 의학에서 암의 확진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은 병리 진단이다. 혈액 검사나 영상 의학적 검사를 통해 암의 가능성을 포착했다면, 최종적인 판단은 우리 몸속에서 떼어낸 세포나 조직을 직접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병리 의사의 몫이다. 본지는 암 진단의 전 과정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연재 기획을 준비했다. 그 첫 번째 순서인 이번 [상]편에서는 내 몸속의 ‘혹’이 채취된 직후,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조직 슬라이드’로 변모하기 전까지의 가장 기초적이고도 치명적인 초기 단계를 취재했다. 환자의 몸을 떠난 조직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데이터로 치환되는 이 은밀한 과정은 진단의 정확도를 결정짓는 핵심 분수령이다.
암이 의심되는 부위에서 조직을 채취하는 행위는 흔히 ‘조직검사’라고 불린다. 하지만 의료계 내부에서 이 과정은 단순히 채취가 아닌 ‘정보의 보존’ 단계로 정의한다. 내시경을 통해 쌀알보다 작은 크기로 떼어내거나, 굵은 바늘을 이용해 원기둥 형태로 뽑아내는 등 방식은 다양하지만 공통된 목표는 하나다. 바로 체내에 있던 세포의 상태를 그대로 박제하는 것이다. 현재 의료 현장에서는 이러한 조직 채취가 이루어지는 즉시 병리과로의 긴박한 여정이 시작되며, 이 짧은 시간 동안 조직에 가해지는 물리적, 화학적 처치가 진단의 성패를 좌우한다.

채취된 조직의 생체 시계를 멈추는 ‘고정’의 기술
환자의 몸에서 분리된 조직은 그 순간부터 자가 소화(Autolysis)와 부패 과정에 돌입한다. 세포 속의 효소들이 제 기능을 잃고 세포 구조를 무너뜨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임상 현장에서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10% 중성 완충 포르말린 용액에 조직을 담그는 ‘고정(Fixation)’ 작업이다. 포르말린은 단백질 사이를 화학적으로 가교(Cross-linking)하여 세포의 형태와 구조를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정시킨다. 이 과정이 지체되거나 농도가 부적절할 경우, 훗날 병리 의사가 현미경을 보았을 때 세포가 뭉개지거나 암세포 특유의 핵 모양이 변형되어 오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조직의 크기에 따라 고정에 소요되는 시간은 천차만별이다. 작은 위 점막 조직은 몇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수술로 절제한 거대한 장기는 속까지 포르말린이 침투하는 데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서울대학교병원 병리과 김지훈 교수는 조직이 환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부터 포르말린 용액에 담기기까지의 ‘냉허혈 시간(Cold Ischemic Time)’을 최소화하는 것이 병리 진단의 질을 결정하는 첫 번째 단추라고 강조했다. 김지훈 교수는 특히 암의 유전자 검사가 보편화된 현재 상황에서 조직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고정 단계의 표준화는 단순히 형태를 보는 것을 넘어 암의 성질을 파악하는 분자 병리 진단의 신뢰성과 직결된다고 설명했다.
육안 검사에서 파라핀 블록 제조까지의 공정
고정이 완료된 조직은 병리 의사의 육안 검사(Gross Examination) 단계를 거친다. 병리 의사는 육안으로 암 조직의 크기, 색깔, 단단함, 그리고 주변 정상 조직과의 경계면을 꼼꼼히 살핀다. 이후 진단에 가장 핵심적인 부위를 선별하여 작은 카세트에 담는다. 이 카세트들은 특수 장비를 통해 탈수와 투명화 과정을 거치는데, 이는 조직 속의 수분을 모두 제거하고 그 자리를 파라핀(초)으로 채우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수분이 남아 있으면 파라핀이 침투하지 못해 조직이 딱딱하게 굳지 않고, 결국 얇게 자르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포매(Embedding)’ 단계에서는 파라핀 액체 속에 조직을 넣고 굳혀 비누 모양의 ‘파라핀 블록’을 만든다. 이 블록은 조직을 수십 년간 변치 않게 보관할 수 있게 해주는 최종적인 저장 매체다. 이 블록이 완성되어야만 비로소 ‘마이크로톰’이라는 정밀 절삭기를 이용해 빛이 투과될 정도의 얇은 두께로 조직을 자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암 진단의 기초가 되는 이 복잡한 공정들은 기계화된 시스템 속에서도 전문가들의 세심한 수작업과 철저한 프로토콜 준수를 요한다.

병리 진단 인프라의 현재와 과제
현재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은 세계적인 수준의 병리 진단 정확도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암 환자의 급증과 정밀 의료의 발전으로 인해 병리과가 감당해야 할 검체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조직 하나를 슬라이드로 만드는 데는 수십 단계의 화학 공정과 물리적 처리가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실수가 발생하더라도 환자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오진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고정액의 신선도 관리부터 온도 조절, 각 단계별 시간 엄수까지 모든 과정은 표준 작업 지침에 따라 엄격히 통제된다.
암 진단의 첫 관문인 조직 채취와 고정은 화려한 첨단 장비보다 기본에 충실한 ‘정성’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환자가 검사실을 나선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이 치열한 기초 작업들이 모여 비로소 암이라는 거대한 적의 실체를 밝혀내는 슬라이드가 완성된다. 이어지는 [중]편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 조각이 어떻게 형형색색의 염색 과정을 거쳐 병리 의사의 눈앞에 펼쳐지는지, 그 시각화의 과정을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서울 민병원 조준훈 병리원장에게 듣는 조직 진단 프로세스의 궁금증
Q. 조직검사를 받은 후 결과가 나오기까지 보통 며칠이 소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직이 환자의 몸에서 채취된 후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슬라이드가 되기까지는 물리적으로 최소 24시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앞서 설명한 고정(Fixation) 단계에서만 조직의 크기에 따라 반나절에서 하루가 꼬박 걸리며, 이후 탈수, 투명화, 파라핀 침투, 포매, 절편 제작, 염색 등의 복잡한 공정을 순차적으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문의의 판독 시간까지 더해지면 통상 3일에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정상적인 프로세스다.
Q. 조직을 고정할 때 사용하는 포르말린 용액이 진단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포르말린은 세포의 단백질 구조를 고정시켜 생체 내 상태와 가장 유사하게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만약 고정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세포의 핵이 붓거나 세포질이 수축하여 암세포인지 정상 세포인지 구분이 어려워진다. 특히 최근에는 암세포의 특정 단백질 발현 여부를 확인하는 면역조직화학염색이나 유전자 검사가 중요한데, 고정이 부적절하면 이러한 특수 검사 결과가 부정확하게 나올 수 있어 치료 방향 설정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Q. 환자가 조직검사 전후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조직 채취는 침습적인 행위이므로 아스피린이나 와파린 같은 항응고제를 복용 중인 환자는 출혈 위험에 대비해 반드시 사전에 의료진과 상의해야 한다. 채취 후에는 해당 부위의 감염이나 출혈 여부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하지만 병리 진단의 공정 자체는 의료진과 병리사의 몫이므로 환자는 안심하고 기다려도 된다. 다만, 본인이 받은 검사가 단순 생검인지 수술적 절제인지에 따라 결과가 나오는 속도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 심리적 불안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