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대면 없이 작성한 가짜 전세계약서는 과실에 의한 방조 행위” 원심 파기환송
실제 중개행위 없이 대리인의 말만 믿고 전세계약서를 작성해 준 공인중개사에게 전세자금 대출 사기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됐다. 대법원 제1부는 지난 5월 29일(대법원 2026. 5. 29. 선고 2025다220652 판결) A대부 주식회사가 공인중개사인 피고를 상대로 제기한 대여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기각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울산지방법원으로 환송했다. 이번 판결은 부동산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계약서 대필’ 행위가 범죄에 악용됐을 때 공인중개사가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사건의 발단은 소외인 일당이 벌인 조직적인 전세 대출 편취 범행이었다. 이들은 가장 임차인을 모집하고 전세계약서 등을 위조하여 금융기관으로부터 전세보증금 담보 대출을 받는 방식으로 거액을 가로채 사기죄 등으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공인중개사인 피고는 일면식이 있던 소외인이 임대인과 임차인의 ‘쌍방대리인’이라고 주장하자, 실제 중개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전세계약서를 작성해 교부했다. 피해를 입은 원고는 중개사가 허위 계약서를 작성해 줌으로써 대출금 상당의 손해를 입었다며 공동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공인중개사의 단순 과실도 불법행위 방조 책임 성립한다
앞서 원심인 울산지방법원은 피고의 중개상 과실이나 손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민법 제760조 제3항의 ‘방조’란 불법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직접·간접의 모든 행위를 말하며, 주의의무를 위반한 과실에 의한 방조도 가능하다는 기존 법리를 재확인했다.
특히 대법원은 공인중개사법 제25조와 제26조를 근거로, 개업공인중개사는 중개가 완성된 때에만 거래계약서 등을 작성·교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개를 하지 않았음에도 함부로 계약서를 작성해 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공인중개사법 위반이라는 지적이다. 부동산 거래계약서가 실제 거래당사자가 아닌 제3자에게 교부될 경우, 제3자가 이를 진실한 것으로 믿고 대출 등 일정한 거래를 하게 될 가능성을 공인중개사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설명이다.
법무법인 지금 김진환 변호사는 “공인중개사법이 거래계약서 작성 주체와 요건을 엄격히 규정한 이유는 부동산 거래의 투명성과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라며 “중개 행위 없이 계약서만 대필해 주는 행위는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금융 사기의 통로로 악용될 소지가 매우 높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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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인 범행에 속았어도 책임 면제 안 돼” 판결의 파장
대법원은 피고가 전세계약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주의의무 위반이 있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피고는 임대인과 임차인을 전혀 대면하지 않은 채 소외인의 말만 믿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당시 소외인이 소지했던 임대인의 도장은 인감도장이 아니었으며, 대리권을 증명할 객관적인 서류조차 제시되지 않았다. 더욱이 전세계약서의 임대인란과 임차인란에는 대리인 표기조차 없이, 마치 본인들이 직접 계약을 체결한 것처럼 서명과 날인이 이루어졌다.
재판부는 소외인이 임대인의 실제 개인정보를 제공했고 보증금이 실제 임대인 계좌로 입금된 점으로 보아 피고 역시 소외인 일당의 계획적인 범행에 속았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만으로 피고의 과실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라며, 이는 단지 손해배상책임의 제한 사유로 고려될 수 있을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즉, 사기 범행의 피해자 성격을 일부 대변하더라도 공인중개사로서의 전형적인 확인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은 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재권 유니온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현장에서는 수수료 명목의 소액을 받고 계약서 작성만 대행해 주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라며 “이번 판결은 사기 일당에게 속아 선의로 대필해 주었다 하더라도, 확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억 대의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다”라고 설명했다.

부동산 중개 업계의 관행적 대필 행위에 경종 울려
이번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로 인해 향후 부동산 중개 시장에서의 계약서 작성 관행은 큰 변화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중개 대상물에 대한 실질적인 확인과 당사자 대면 없는 계약서 교부가 가져올 법적 위험성이 구체화됐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원심이 공인중개사의 주의의무와 과실에 의한 공동불법행위 법리를 오해하여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사건을 다시 받아든 울산지방법원은 대법원의 취지에 따라 피고의 과실 범위와 원고의 손해액 간의 인과관계를 다시 심리·판단하게 됐다.
법조계와 부동산 업계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공인중개사의 본인 확인 절차가 더욱 까다로워질 것으로 전망한다. 비대면 거래나 대리인을 통한 계약 시 인감증명서 확인, 위임장 검증은 물론이고 거래 당사자와의 직접 통화나 화상 대면 등 다각도의 검증 절차가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단순한 행정 편의나 친분 관계에 기반한 계약서 대필 행위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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