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극심한 피로 호소하는 쉬한 증후군 환자, 산후 과다출혈에 의한 호르몬 이상
출산 이후 겪는 극심한 피로감과 무기력을 단순한 산후풍이나 육아 스트레스로 치부하다가 치명적인 질환을 놓치는 사례가 현재 빈번하게 보고되고 있다. 특히 분만 과정에서 대량의 출혈을 경험한 산모라면 ‘쉬한 증후군(Sheehan’s syndrome)’ 가능성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출산 시 과다출혈로 인해 뇌하수체에 혈액 공급이 차단되면서 조직이 괴사하고, 이로 인해 신체에 필요한 필수 호르몬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는 희귀 내분비 질환이다. 적절한 진단 시기를 놓칠 경우 전신 기능 저하뿐만 아니라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급성 부신 위기까지 초래할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산후 과다출혈로 인한 뇌하수체 괴사의 병태생리학적 기전
임신 중에는 태아의 성장을 돕고 출산을 준비하기 위해 산모의 뇌하수체가 평소보다 약 2배 가까이 커진다. 뇌하수체는 우리 몸의 ‘호르몬 관제탑’ 역할을 수행하며 갑상선, 부신, 난소 등의 기능을 조절하는 다양한 호르몬을 생성한다. 하지만 크기가 비대해진 만큼 혈액 요구량도 급격히 증가하는데, 분만 시 대량 출혈이 발생하여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면 뇌하수체로 가는 혈류가 차단되는 허혈성 손상이 발생한다. 혈액 공급이 중단된 뇌하수체 조직은 급격히 괴사하며, 한 번 파괴된 조직은 재생되지 않아 영구적인 호르몬 결핍 상태에 빠지게 된다.
쉬한 증후군은 출산 직후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조직의 파괴 정도에 따라 수년 혹은 수십 년 후에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다. 2016.11.23. Orphanet Journal of Rare Diseases에 게재된 Sami Akbari 교수팀의 논문 [Sheehan’s syndrome]에 따르면, 뇌하수체 전엽 조직의 약 75%에서 90% 이상이 파괴되어야 명확한 임상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초기에는 단순히 기운이 없고 젖이 잘 나오지 않는 증상으로 시작돼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다. 현재 의학계에서는 분만 시 수혈이 필요할 정도의 출혈이 있었던 산모라면 호르몬 수치에 대한 장기적인 추적 관찰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산후풍으로 오인하기 쉬운 전신 무기력증과 호르몬 결핍 증상
쉬한 증후군의 가장 특징적인 초기 증상은 유즙 분비 부전이다. 출산 후 에스트로겐 수치가 낮아지면서 뇌하수체에서 프로락틴 호르몬이 분비되어야 젖이 나오는데, 뇌하수체가 손상되면 모유 수유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또한 출산 후 시간이 흘러도 생리가 다시 시작되지 않는 무월경 상태가 지속된다. 이는 성선자극호르몬 결핍에 따른 결과로, 조기 폐경과 유사한 안면 홍조, 질 건조증 등의 증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많은 산모가 이를 출산 후 겪는 자연스러운 신체 변화나 산후풍으로 오해하여 방치하곤 한다.
부신피질자극호르몬과 갑상선자극호르몬이 결핍되면 증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만성적인 피로감, 식욕 부진, 체중 감소, 저혈압 등이 나타나며 피부가 비정상적으로 창백해지거나 겨드랑이 및 음부의 체모가 탈락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한다. 서울 민병원 김경래 내과 대표원장(내분비내과 전문의)은 “쉬한 증후군은 증상이 매우 서서히 진행되므로 환자 스스로 노화나 육아 피로로 생각하기 쉽다”며 “분만 시 과다 출혈 경험이 있는 여성이 이유 없는 무기력증과 무월경을 겪는다면 반드시 내분비 전문의를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혈액 검사 및 영상 진단을 통한 쉬한 증후군의 확진 절차
쉬한 증후군이 의심될 경우 가장 먼저 시행하는 것은 복합 뇌하수체 기능 검사다. 이는 인슐린, L-도파 등을 투여해 뇌하수체를 자극했을 때 각 호르몬이 정상적으로 분비되는지 확인하는 정밀 검사다. 혈액 내 갑상선 호르몬, 부신피질 호르몬, 성호르몬 수치를 측정하여 결핍 여부를 파악한다. 2022.04.14. Frontiers in Endocrinology에 게재된 터키 에르지예스 대학교 Fatih Tanriverdi 교수팀의 논문 [Sheehan’s Syndrome: Modern Perspectives and Current Challenges]에 따르면, 환자들의 상당수가 진단까지 평균 10년에서 2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으며 가장 흔한 결핍 호르몬은 성장호르몬과 복합 호르몬 결핍으로 나타났다.
영상 의학적 검사도 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뇌 MRI 촬영을 통해 뇌하수체의 크기와 형태를 관찰하는데, 앞서 언급한 Fatih Tanriverdi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쉬한 증후군 환자의 경우 뇌하수체가 심하게 위축되어 있거나 뇌하수체가 위치하는 공간인 ‘터키안’이 비어 있는 ‘빈 터키안 증후군(Empty Sella Syndrome)’ 소견이 흔히 발견된다. 이는 뇌하수체 조직이 괴사하고 남은 공간을 뇌척수액이 채우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정밀 검사를 통해 호르몬 결핍의 원인이 뇌하수체 자체의 문제임을 확증할 수 있다.
평생 지속되는 호르몬 보충 요법과 체계적인 사후 관리 방안
쉬한 증후군으로 진단받으면 파괴된 뇌하수체 기능을 대신할 호르몬 보충 요법을 평생 유지해야 한다. 부신피질 호르몬, 갑상선 호르몬, 에스트로겐 등을 약물 형태로 복용하며 신체 대사 균형을 맞춰야 한다. 특히 부신피질 호르몬이 부족한 상태에서 감염이나 수술 등 신체적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면 쇼크에 빠질 수 있으므로 환자는 자신이 쉬한 증후군 환자임을 알리는 카드나 팔찌를 소지하는 것이 권고된다. 2018.03.14. Endocrine 학술지에 게재된 Y.C. Geerlings 박사팀의 리뷰 논문 [Sheehan’s syndrome: a review of recent updates] 결과, 조기에 호르몬 대체 요법을 시작한 환자군이 그렇지 않은 군에 비해 골다공증 및 심혈관 질환 발생 위험이 유의미하게 낮았다.
현재 의료 현장에서는 환자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정기적인 호르몬 수치 모니터링을 시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경래 원장은 호르몬 농도가 너무 낮으면 증상이 개선되지 않고, 반대로 너무 높으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특히 가임기 여성의 경우 성호르몬 보충을 통해 자궁 내막을 보호하고 골밀도 저하를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쉬한 증후군은 완치되는 질환은 아니지만, 적절한 약물 복용을 통해 일반인과 다름없는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만큼 막연한 공포보다는 정확한 진단과 꾸준한 관리가 핵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