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세포가 암의 아군으로 돌변, 종양 환경에 노출된 호중구, CCL3 생성하며 항암 기능 상실
스위스 제네바대학교(UNIGE)와 루드비히 암 연구소 공동 연구진이 인체 면역 시스템의 최전선 방어군인 호중구(Neutrophils)가 암세포에 의해 재프로그래밍되어 오히려 암 성장을 돕는 핵심 메커니즘을 규명했다. 연구진은 호중구가 종양 미세 환경에 노출되면 케모카인 분자인 CCL3를 생성하기 시작하며, 이 CCL3가 다양한 암 유형에서 종양 진행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핵심 인자로 작용함을 확인했다.
지난 10일 자 국제 학술지 ‘캔서 셀(Cancer Cell)’에 발표된 이 연구 결과는 암의 진행 경로를 이해하고 환자 맞춤형 치료 전략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방어군 호중구, 암의 동맹군으로 변모하다
호중구는 신체에서 가장 풍부한 면역세포 중 하나로, 보통 감염이나 부상에 대한 초기 방어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암 환자에게서 호중구가 다수 발견될 경우, 이는 종종 질병 예후가 나쁘다는 신호로 해석됐다. 미카엘 피테트(Mikaël Pittet) 제네바대 의과대학 병리학 및 면역학과 교수가 이끈 연구팀은 암세포가 호중구를 적극적으로 모집한 후, 그들의 행동 방식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종양 환경에 유입된 호중구는 활동이 재프로그래밍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호중구는 국소적으로 CCL3라는 분자를 생성하기 시작하며, 이 CCL3가 항암 기능을 잃게 된 호중구를 암 성장을 촉진하는 세포로 완전히 전환시킨다. 피테트 교수는 “호중구가 종양에 의해 유도된 재프로그래밍을 통해 CCL3를 만들어내고, 이는 결국 종양 성장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설명했다. 이 전환은 본래 보호 기능을 수행하던 면역 반응이 암세포가 번성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뒤바뀌었음을 의미한다.
CCL3 분자, 암 진행의 새로운 지표로 부상
암은 주변의 다양한 세포 유형이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연구진은 이 복잡한 환경에서 종양 성장을 실제로 주도하는 핵심 요소를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번 연구에서 CCL3가 다양한 유형의 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확인되면서, 이는 질병 진행을 추적하는 데 유용한 지표로 활용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연구를 주도한 미카엘 피테트 교수는 “2023년 연구에서 대식세포의 두 유전자 발현이 질병 진행과 강하게 연관됨을 보인 바 있다”며, “이번 새로운 연구는 또 다른 면역세포 집단인 호중구와 관련된 두 번째 변수(CCL3)를 확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즉, CCL3의 생성 여부가 종양의 공격성과 궤적을 예측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단순한 사실 나열을 넘어, 암의 정체성을 해독하고 질병의 진화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를 하나씩 밝혀내는 과정으로 풀이된다.

유전자 조작 난제 극복, CCL3 차단 효과 입증
호중구는 유전적으로 조작하고 연구하기가 특히 어려운 세포로 알려져 있다. 연구 공동 저자인 에반젤리아 볼리(Evangelia Bolli) 박사는 “호중구는 유전적 활동이 낮아 표준 분석 도구로는 종종 보이지 않아 연구에 기술적 어려움이 따랐다”고 전했다. 연구팀은 이러한 기술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복합적인 실험 전략을 사용했다.
연구진은 다른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호중구 내 CCL3 유전자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CCL3가 제거되자 호중구는 더 이상 종양 성장을 지원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호중구들은 혈류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했으며 종양 내에 축적될 수 있었지만, 유해한 재프로그래밍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CCL3가 호중구의 종양 촉진 효과를 유발하는 핵심 스위치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대규모 데이터 분석으로 범용적 패턴 확인
연구팀은 자신들의 실험 결과를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독립적인 연구 데이터셋을 재분석했다. 공동 제1 저자인 프라티악샤 위라파티(Pratyaksha Wirapati) 생물정보학 전문가는 호중구를 더 정확하게 감지하기 위한 새로운 분석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고 밝혔다. 이 새로운 분석법을 통해 연구팀은 많은 암 유형에서 호중구가 CCL3를 대량 생산하며, 이것이 종양 촉진 활동과 연관된다는 공통적인 궤적을 공유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이러한 대규모 데이터 분석 결과는 CCL3 매개 호중구 재프로그래밍이 특정 암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광범위한 암 진행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패턴임을 시사한다. 이 발견은 암 치료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된다.
맞춤형 암 관리를 위한 핵심 변수
연구팀은 CCL3를 호중구 주도 종양 성장의 핵심 동인으로 식별함으로써, 암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이해하는 데 유망한 새로운 변수를 발견했다. 피테트 교수는 “우리는 질병의 진화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들을 하나씩 식별하여 종양의 ‘신분증’을 해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러한 변수들이 제한된 수에 불과할 수 있으며, 일단 정확하게 식별된다면 각 환자의 관리 방식을 더 잘 맞춤화하고 궁극적으로 더 효과적이고 개인화된 치료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는 면역항암제 치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새로운 표적을 제시하며, CCL3를 차단하는 전략이 암 진행을 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