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의 핵심으로 부상한 미국식 위험조정 모델 도입의 문제점 전격 해부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은 정부가 검토 중인 지불제도 개편 방안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기 위해 “미국의 계층적 질환군(CMS-HCC) 위험조정 모델 도입의 문제점 분석”을 발간했다고 2026년 6월 11일 밝혔다. 연구원은 정부의 ‘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에 포함된 미국식 위험조정 모델의 무리한 국내 도입이 가져올 파장을 집중 분석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해당 시범사업을 발표하고 올해 시행을 목표로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기존의 행위별 수가체계에 묶음지불, 성과보상, 그리고 계층적 질환군(HCC) 위험조정을 반영한 환자군 기반 지불모형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에 발맞춰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도 한국형 계층적 질환군(NHIS-HCC) 개발 현황과 환자 등록제 도입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의료정책연구원은 정부가 지속적인 의료이용 및 의료비 지출 증가를 통제하겠다는 목적으로 이 모델을 검토하고 있으나, 이는 한국 의료환경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연구원은 출발점 자체가 판이한 제도를 일선 의원급 의료기관에 전면 적용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민간보험 역선택 방지책을 공보험에 이식하려는 구조적 모순
의료정책연구원은 미국의 CMS-HCC 모델이 탄생한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이 모델은 미국의 메디케어 어드밴티지(Medicare Advantage) 체계에서 민간보험사들이 건강한 가입자만 선호하고 질환자가 기피하는 역선택(Favorable Selection)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고안됐다. 과거 인구통계학적 요인만 반영하던 AAPCC 방식이 의료비 예측에 한계를 보이자, 1997년 균형예산법(BBA)에 의해 건강상태 기반의 위험조정 체계로 진화한 결과물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 국민이 단일 공보험 체계 아래에서 동일한 혜택을 누리며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접근성을 보장받고 있다고 의료정책연구원은 강조했다. 연구원은 민간보험사 간의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해 만든 도구를 전 국민 단일보험 체계인 한국의 일차의료기관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식 모델은 환자의 연령, 성별과 함께 전년도 진단 코드(ICD-10-CM)를 조합해 위험점수(RAF Score)를 산출하고 이를 기준으로 보험료 지급액을 결정하는데, 이러한 계산 방식이 국내 의료 구조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연구원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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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현장의 왜곡을 부르는 업코딩과 과소진료의 그늘
의료정책연구원 보고서는 HCC 모델이 도입될 경우 의료기관이 환자의 진단 코딩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업코딩(Upcoding)’ 현상이 만연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의 행위별 수가제에서는 추가적인 진단 기재가 의원의 수익과 직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진단 코드가 위험조정계수(RAF)와 연동되는 HCC 체계 하에서는 어떤 코드를 입력하느냐에 따라 보상 수준이 결정된다. 이에 따라 연구원은 경계성 질환을 확정 진단으로 기록하거나 이미 안정된 질환을 보상 유지를 위해 매년 반복 기재하는 부작용이 속출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메디케어 지급자문위원회(MedPAC) 역시 업코딩으로 인한 정부의 초과 지급액이 연간 수십억 달러에 달한다고 지적한 바 있음을 연구원은 근거로 제시했다.
이와 동시에 환자에게 필요한 정당한 의료서비스까지 제한하는 ‘과소진료’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의료정책연구원의 주요 우려 사항이다. 위험공유(Risk-sharing) 모델에서는 비용 절감 압박이 커질수록 의료기관이 검사나 입원, 전문치료 이용을 보수적으로 억제하려는 유인이 작동하게 된다. 연구원은 한국이 인구 10만 명당 회피가능사망률 142.0명(2020년 기준)으로 OECD 평균(239.1명)보다 현저히 낮은 우수한 성과를 내는 비결이 높은 외래 접근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비용 통제 중심의 위험조정이 강화되면 장기적으로 환자의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게 만들어 국민 건강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 연구원의 판단이다.

1년의 시간지연이 초래할 중증·복합질환자 기피 현상
의료정책연구원은 HCC 모델이 가진 치명적인 결함으로 ‘시간지연(Time lag)’ 문제를 꼽았다. 이 모델은 전년도 청구 데이터에 기록된 진단 이력을 바탕으로 이듬해의 의료비를 예측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이로 인해 급성 질환이 발생하거나 환자의 기능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을 때 이를 지불 보상에 즉각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생겼다. 연구원은 특히 다질환을 앓는 고령 환자의 경우 단기간 내 의료 필요도가 요동치는데, 과거 데이터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의료기관에 부당한 재정적 시차 부담을 지우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보상의 시차와 불충분성은 결국 ‘환자 회피 현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의료정책연구원은 내다봤다. 복합질환을 가진 고위험 환자는 다량의 의료 자원이 투입돼야 하므로, 위험조정 보상이 실제 진료비에 미치지 못하면 의료기관의 경영적 손실로 이어진다. 정부가 재정 안정을 이유로 위험조정계수(RAF)의 상한선을 임의로 설정할 경우, 일선의원들이 관리 부담이 큰 중증 환자의 등록이나 진료를 기피하는 ‘선택 행태(Selection behavior)’를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연구원은 경고했다. 결과적으로 치료가 가장 시급한 취약 계층의 의료접근성이 저하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한국 고유의 의료 문화 및 진단 코드 중심 체계의 한계
국내의 자유로운 의료 이용 문화와 미국식 제도의 충돌 가능성도 의료정책연구원에 의해 제기됐다. 미국식 HCC 관리모델은 환자가 특정 의원이나 주치의에게 귀속되어 장기적인 관리를 받는 ‘환자 등록제’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한국의 환자들은 원하는 의료기관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동일 질환에 대해서도 여러 의원과 병원을 제한 없이 방문하는 문화에 익숙하다. 연구원은 이러한 고유의 의료 전달 체계와 이용 행태를 무시한 채 등록제 기반의 제도를 강제하는 것은 극심한 구조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진단 코드에만 의존하는 지불 제도의 임상적 한계도 명확하다고 연구원은 밝혔다. 청구자료 중심의 위험점수 산출은 환자의 실제 의료 필요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능 상태, 사회경제적 취약성, 가족의 돌봄 지원 여부, 건강문해력 등 ‘사회적 결정요인(SDOH)’을 담아내지 못한다. 의료정책연구원은 동일한 당뇨병 코드를 가진 환자라 하더라도 환자의 생활습관 관리 수준이나 돌봄 환경에 따라 필요한 자원의 양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수치화된 코드가 실제 임상 현장의 필요도를 대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일차의료 행정 마비 우려와 신중한 단계적 검증의 당위성
의료정책연구원은 행정적 규제 부담의 폭증을 문제로 삼았다. 가입자별 진단 코드를 상시 정밀하게 기록하고 청구 오류를 검토하는 작업은 일선 의원에 막대한 행정업무를 지우게 된다. 나아가 정부가 업코딩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의무기록 사후 검증과 감사를 강화할 경우, 의료 현장의 자율성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연구원은 보았다. 국내 일차의료 의원의 80%가량이 1~2인 규모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행정 부담은 진료 역량의 저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의료정책연구원은 미국 현지에서도 HCC 모델 도입 이후 업코딩과 고위험 환자 회피 등의 구조적 결함이 현재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음을 재차 확인했다. 연구원은 정부가 인프라와 제도적 기반이 미비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도입을 밀어붙인다면 적정 보상이라는 본래 취지는 퇴색되고 재정 부담 증가와 의료 붕괴라는 부작용이 먼저 닥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따라서 단순한 수가 개편 차원을 넘어 의료전달체계 전반과 연계된 정책인 만큼 국내 환경에 맞는 신중한 시범사업과 단계적 검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연구원은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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