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가 챙긴 내 자기부담금, 쌍방과실 차 사고 시 피보험자의 자기부담금 청구 권리,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도로 위에서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충돌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여파는 길고 지루하다. 특히 쌍방과실 사고에서 자신의 보험으로 차량을 수리하는 ‘자차 처리’를 선택한 운전자들은 수리비의 일정액을 ‘자기부담금’이라는 명목으로 지불한다. 대개 20만 원에서 50만 원 사이의 이 돈은 사고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내야 하는 세금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 보험사들은 뒤에서 서로의 과실을 따져 구상금을 주고받으며 소비자가 낸 그 돈까지 자신들의 수익으로 챙겨왔다.
최근 대법원 제2부(재판장 박영재 대법관, 주심 권영준 대법관, 오경미·엄상필 대법관)이 내린 파기환송 판결은 이러한 보험업계의 오랜 관행에 철퇴를 가하며, 주머니 속에서 잠자고 있던 소비자의 권리를 깨웠다.

약관의 함정에 빠진 소비자들과 보험사의 은밀한 정산
사건의 재구성은 이렇다. 원고 A씨는 쌍방과실 사고를 당한 후 자신의 보험사로부터 수리비 270만 원 중 자기부담금 50만 원을 제외한 220만 원을 받았다. A씨는 자신의 돈 50만 원을 보태 수리를 마쳤다. 이후 A씨의 보험사는 상대방 보험사를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했다. 상대방의 과실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보험사는 A씨가 낸 50만 원을 포함한 전체 수리비를 기준으로 구상금을 청구했고, 상대방 보험사로부터 약 108만 원을 받아냈다. 상식적으로라면 이 108만 원 중 일부는 A씨가 직접 지출한 50만 원을 보전하는 데 쓰여야 한다. 하지만 보험사는 이 돈을 모두 자신들의 금고로 직행시켰다. A씨는 사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생돈 50만 원을 날린 셈이 됐다.
원심인 대전지방법원은 보험사의 손을 들어줬다. A씨가 자기부담금 약정이 포함된 보험을 스스로 선택했으므로, 그 비용은 계약에 따른 본인 부담이라는 논리였다. 이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보험사 편향적인 해석이었다. 소비자가 자기부담금 약정을 맺는 이유는 보험료를 낮추기 위함이지, 상대방 과실로 발생한 손해까지 자신이 독박을 쓰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대법원은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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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파기환송, 보험자대위권의 한계를 명확히 긋다
대법원 제2부의 판단은 단호했다. 핵심은 ‘보험자대위’의 범위다. 상법 제682조에 규정된 보험자대위권은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했을 때 피보험자의 제3자에 대한 권리를 승계하는 제도다. 그러나 이 권리는 무한정하지 않다. 대법원은 피보험자가 보험사로부터 받은 보험금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남은 손해’가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피보험자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판시했다. 즉, 보험사가 상대방 보험사로부터 구상금을 받아낼 때, 피보험자가 직접 낸 자기부담금만큼은 보험사가 가로챌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이다.
이번 판결은 2015년 전원합의체 판결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당시 대법원은 화재보험 등에서 보험사가 지급한 보험금이 실제 손해액에 미치지 못할 경우, 피보험자가 제3자로부터 남은 손해액을 먼저 배상받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번 판결은 이 원칙을 자동차보험의 자기부담금 영역까지 명확하게 확장 적용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다. 보험사가 피보험자에게 지급하지도 않은 돈(자기부담금)을 근거로 상대방에게 구상권을 행사해 수익을 올리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는 부당한 행위임을 천명한 것이다.
김진환 법무법인 지금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보험사가 피보험자의 손해를 완전하게 보상하기도 전에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던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는 중대한 전환점”이라며, “보험자대위권의 행사는 피보험자의 남은 손해액이 모두 충당된 이후에야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피보험자 우선 원칙, 손해의 완전한 회복이 우선이다
보험사들은 그동안 ‘자기부담금은 피보험자가 최종적으로 책임지기로 한 금액’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환급을 거부해왔다. 하지만 대법원의 시각은 다르다. 자기부담금은 보험사와 피보험자 사이의 ‘계약상’ 분담금일 뿐, 사고를 일으킨 가해자의 ‘배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수단이 아니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전체 손해에 대해 자신의 과실만큼 배상할 의무가 있고, 그 배상금은 피해자의 손해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피해자에게 먼저 돌아가야 한다.
만약 전체 수리비가 100만 원이고 상대방 과실이 60%라면, 상대방은 6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 이때 피해자가 자기부담금으로 20만 원을 냈다면, 상대방이 주는 60만 원 중 20만 원은 피해자의 주머니로 먼저 들어가야 한다. 보험사는 나머지 40만 원만 가져가는 것이 정의롭다. 그동안 보험사는 60만 원 전체를 가져가면서 피해자의 20만 원 손해는 모른 척했다. 이것이 바로 대법원이 지적한 ‘보험자대위의 남용’이다.
실무적 파장과 소비자가 반드시 챙겨야 할 권리
이번 판결로 인해 보험업계는 거센 후폭풍에 직면하게 됐다. 그동안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챙겨온 수조 원대 규모의 자기부담금이 환급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이제 쌍방과실 사고 시 자차 처리를 하더라도, 상대방 과실 비율만큼의 자기부담금을 돌려받을 법적 근거를 확실히 갖게 됐다. 보험사가 구상금을 받아냈는지 확인하고, 받아냈다면 내 몫을 내놓으라고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다만 보험사들이 순순히 돈을 내줄 리 만무하다. 소멸시효 문제나 개별 사건의 특수성을 이유로 환급을 지연시킬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금융당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표준약관의 개정이 시급하다. 대법원의 판결이 단순히 종이 위의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시스템적으로 환급이 이루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소비자의 무지를 이용해 배를 불려온 보험사들의 후진적인 관행은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한다.
최청희 법무법인 CNE 대표변호사는 “소비자들이 그동안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비용으로 오해했던 자기부담금이 사실은 보험사의 구상권 행사 과정에서 최우선으로 반환되어야 할 권리였음이 명확해졌다”며, “소멸시효가 지나기 전에 자신의 사고 내역을 확인하고 환급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권리 행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재권 유니온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자기부담금 환급은 단순히 돈을 돌려받는 문제를 넘어 보험 계약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법적 쟁점”이라며, “보험사가 약관의 모호함을 악용해 피보험자의 이익을 가로채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본의 논리를 이긴 법의 상식
보험은 불확실한 미래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한 사회적 약속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거대 자본인 보험사의 이익만을 위해 작동해왔다면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착취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약관’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성벽 뒤에 숨어 소비자의 푼돈을 챙겨온 보험사들에게 보내는 엄중한 경고장이다. 법은 더 이상 보험사의 편의를 위해 소비자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제 공은 보험사와 금융당국으로 넘어갔다. 수십 년간 이어온 부당한 관행을 스스로 바로잡을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탐욕을 부리다 신뢰라는 근간마저 잃을 것인가. 소비자의 눈은 이미 그들의 금고를 향하고 있다.
대법원은 이러한 법리를 바탕으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의 판단에는 소액사건심판법 제3조 제2호에서 정한 구체적인 당해 사건에 적용할 법령의 해석에 관하여 대법원이 내린 판단과 상반되는 해석을 전제로 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원심의 잘못은 판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 원심판결을 파기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교통사고 후 보험사 간의 구상금 정산 과정에서 피보험자의 자기부담금 청구권이 부당하게 침해당하지 않도록 제동을 건 의미 있는 판례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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