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 기억 재생 교란, 초기 인지 기능 저하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돼
알츠하이머병이 기억을 손상시키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 기존에는 알츠하이머가 뇌의 기억 저장 과정을 단순히 멈추게 한다고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휴식 중 발생하는 ‘기억 재생(Memory Replay)’ 활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게 뒤섞어 초기 기억 상실 및 길찾기 능력 저하를 유발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UCL 과학자들이 2026년 2월 1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알츠하이머와 유사한 병리를 가진 쥐 모델에서 기억을 강화하는 뇌세포인 ‘장소세포(Place Cells)’의 신호가 불안정해지고, 그 결과 기억을 저장하는 핵심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알츠하이머의 초기 증상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기억 저장소 해마에서 발생하는 ‘장소세포’ 활동
기억 재생 활동은 학습과 기억에 필수적인 뇌 영역인 해마(Hippocampus)에서 일어난다. 해마에는 특정 위치에 반응하는 뉴런인 장소세포가 존재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상자인 UCL 신경과학자 존 오키프 교수가 발견한 세포다. 사람이나 동물이 공간을 이동할 때, 장소세포들은 특정 순서로 활성화된다. 이후 휴식 시간 동안, 이 세포들은 경험했던 순서와 동일하게 빠르게 재활성화되는데, 이 과정이 바로 기억 재생이며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연구 공동 저자인 사라 시플리 박사(UCL 세포 및 발달 생물학)는 알츠하이머병이 뇌에 유해한 단백질과 플라크가 축적되면서 발생하며, 이로 인해 기억 상실과 길찾기 어려움 같은 증상이 나타나지만, 이 플라크가 정확히 어떻게 정상적인 뇌 활동을 방해하는지는 명확히 이해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질병이 진행됨에 따라 뇌세포 기능이 어떻게 변하는지 추적하여 증상의 원인을 파악하고자 했다.
기억 재생의 ‘혼란’: 패턴은 유지되나 내용은 뒤섞여
연구팀은 쥐가 간단한 미로에서 길을 찾는 동안 특수 전극을 사용하여 약 100개의 개별 장소세포 활동을 동시에 기록했다. 이를 통해 아밀로이드 플라크 병리를 가진 쥐와 건강한 쥐의 뇌 재생 패턴을 비교했다. 그 결과, 알츠하이머 병리를 가진 쥐에서도 기억 재생 이벤트 자체는 건강한 쥐와 동일한 빈도로 발생했다.
그러나 재생되는 패턴은 더 이상 조직적이지 않았다. 기억을 강화해야 할 장소세포들의 협응 활동이 무작위로 뒤섞인 것이다. 즉, 기억 재생 과정 자체가 멈춘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혼란에 빠져버린 셈이다. 이처럼 재생이 무질서해지자, 영향을 받은 쥐들의 장소세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정성을 잃었다. 개별 뉴런들은 특정 위치를 더 이상 일관되게 나타내지 못했고, 이는 특히 휴식 기간 이후에 두드러졌다. 휴식 기간은 원래 기억 재생을 통해 신호를 강화해야 하는 시점이다.
김기주 선한빛요양병원 병원장 (신경과 전문의)은 “기존에 단순히 기억 저장 기능이 멈춘다고 여겨졌던 것과 달리, 이 연구는 휴식 중 일어나는 기억 재생 활동 자체가 무질서해진다는 새로운 기전을 제시한다”며, “이는 알츠하이머 초기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익숙한 환경에서의 길찾기 어려움이나 방향 감각 상실 등 공간 기억 장애를 매우 잘 설명해준다”고 설명했다.

기억 통합 실패와 길찾기 능력 저하의 연관성
이러한 뇌 활동의 변화는 쥐의 행동에도 명확한 영향을 미쳤다. 기억 재생이 교란된 쥐들은 미로에서 훨씬 나쁜 성과를 보였으며, 이미 탐색했던 경로를 자주 다시 방문하는 등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초기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익숙한 환경에서도 길을 잃는 증상과 유사하다.
공동 저자인 캐스웰 배리 교수(UCL 세포 및 발달 생물학)는 “이번 연구는 단일 뉴런 수준에서 관찰되는 기억 통합 과정의 실패를 밝혀냈다”며 “재생 이벤트는 여전히 발생하지만, 정상적인 구조를 잃어버렸다는 점이 놀랍다. 뇌가 기억 통합을 시도하는 것을 멈춘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기 진단 및 치료 표적 개발 가능성 제시
배리 교수는 이러한 발견이 광범위한 손상이 발생하기 전에 알츠하이머를 조기에 감지할 수 있는 새로운 테스트 개발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정상적인 기억 재생 활동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 치료법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연구팀은 현재 알츠하이머 증상 치료에 사용되는 약물의 표적이 되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을 통해 기억 재생 과정을 조작할 수 있는지 여부를 추가로 조사하고 있다.
연구진은 메커니즘을 더 잘 이해함으로써 기존 치료법의 효과를 높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케임브리지 트러스트, 웰컴, 메이슨 자선 재단 등의 지원을 받아 UCL 생명과학 및 뇌과학 학부 과학자들에 의해 수행됐다.
김기주 선한빛요양병원 병원장 (신경과 전문의)은 “이번 연구는 알츠하이머 치료의 표적을 뇌의 광범위한 손상이 아닌, 기억 통합의 핵심 단계인 장소세포의 질서 정연한 재생 활동 복원에 맞출 수 있음을 시사한다”며, “이는 질병의 아주 초기 단계에서 개입할 수 있는 비약물적 혹은 약물적 치료 전략 개발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