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한 치메라 혈액형, 두 개의 유전자가 한 몸에서 공존하는 기묘한 생물학적 현상
평생을 A형으로 알고 살아온 한 남자가 정기 검진에서 자신의 혈액형이 A형과 B형이 섞인 상태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병원의 오진을 의심하며 여러 차례 재검사를 반복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혈관 속에는 두 종류의 피가 공존하고 있었고, 이는 의학적으로 ‘치메라(Chimera)’라고 불리는 극히 희귀한 현상이다.
그리스 신화 속 사자의 머리, 염소의 몸, 뱀의 꼬리를 가진 괴물 ‘키마이라’에서 유래한 이 명칭은 한 개체 안에 서로 다른 유전 형질이 공존하는 상태를 뜻한다. 단순히 혈액형이 바뀌는 마술 같은 일이 아니라, 생명 탄생의 초기 단계에서 벌어진 기묘한 사건의 결과물이다.

사라진 쌍둥이가 남긴 유전적 흔적 ‘바니싱 트윈’
치메라 혈액형이 발생하는 가장 대표적인 원인은 ‘바니싱 트윈(Vanishing Twin)’ 현상이다. 임신 초기 단계에서 이란성 쌍둥이가 수정됐으나, 발달 과정에서 한쪽 배아가 다른 쪽 배아에 흡수되면서 발생한다. 이때 흡수된 배아의 세포가 사라지지 않고 생존한 배아의 신체 일부로 자리 잡게 된다. 결과적으로 태어난 아이는 하나의 몸 안에 자신과 사라진 형제의 유전자를 동시에 갖게 된다.
혈액을 생성하는 골수 세포에 이 유전적 결합이 일어나면, 한 사람의 몸에서 두 가지 혈액형이 동시에 나타나는 ‘혈액 치메라’가 형성된다. 이는 전체 인구 중 극소수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인이 헌혈을 하거나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평생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골수 이식과 수혈이 만들어내는 인위적 치메라
선천적인 원인 외에도 후천적으로 치메라 혈액형이 나타날 수 있다. 가장 흔한 사례는 골수 이식이다. 백혈병이나 재생불량성 빈혈 환자가 타인의 골수를 이식받으면, 이식된 골수 세포가 새로운 피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만약 기증자와 수혜자의 혈액형이 다르다면, 환자의 몸속에는 원래 자신의 혈액형과 기증자의 혈액형이 공존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기증자의 골수가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환자의 혈액형은 기증자의 것으로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또한 대량 수혈을 받은 직후에도 일시적으로 두 종류의 혈액형이 검출될 수 있으나, 이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반면 선천적 치메라는 유전자 자체가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어 평생 지속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친자 확인 검사를 뒤흔든 유전적 미스터리
치메라 현상은 때로 법적,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 과거 미국의 한 여성은 자녀의 친자 확인 검사에서 생물학적 어머니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판정을 받았다. 자신이 직접 낳은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밀 조사 결과, 그녀는 치메라였음이 밝혀졌다. 그녀의 혈액 유전자와 난소의 유전자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자녀들은 그녀의 몸속에 흡수됐던 ‘사라진 쌍둥이 형제’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셈이었다.
이처럼 치메라는 현대 의학의 표준인 DNA 검사마저 무력화할 수 있는 변수를 제공한다.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혈액의 DNA와 용의자의 구강 상피 세포 DNA가 일치하지 않아 수사에 혼선을 빚는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이유다.
진단검사의학이 밝혀내는 인체의 다중성
치메라 혈액형의 진단은 진단검사의학과의 정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혈액형 검사에서 반응이 모호하거나, A형과 B형의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는 ‘혼합 시야 응집(Mixed Field Agglutination)’ 현상이 관찰될 때 의사들은 치메라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유세포 분석기(Flow Cytometry)를 통해 서로 다른 세포군을 분리하고, 각 세포의 DNA를 대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확진이 가능하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존재가 사실은 결합된 두 존재의 공존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인체의 신비로움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