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 없는 나라 아이슬란드, 김씨도 이씨도 없다… 오직 ‘누구의 자녀’만 존재한다.
여행자가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낡은 전화번호부를 펼쳤다고 가정해보자. 누군가를 찾기 위해 성(Family Name)을 기준으로 ‘J’ 항목을 뒤적이다가는 곧바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수천 명의 ‘욘(Jón)’이 끝도 없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직업이나 주소가 적혀 있어 겨우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이름 체계를 가진 나라, 바로 아이슬란드다.
대부분의 서구 국가나 동양권 국가들이 가문의 성씨를 물려받아 혈통을 증명하는 것과 달리, 아이슬란드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성’이 없다. 대신 그들은 자신이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딸인지를 이름에 직접 새겨 넣는다. 천 년 전 바이킹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제도는 단순한 작명법을 넘어, 아이슬란드인들의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가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이 곧 나의 성이 된다
아이슬란드의 작명법은 ‘부계명(Patronymic)’과 ‘모계명(Matronymic)’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에 기초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의 이름 뒤에 아들이면 ‘손(-sson)’, 딸이면 ‘도티르(-dóttir)’를 붙여 성을 대신한다. 예를 들어, ‘에이릭(Eiríkur)’이라는 남자가 ‘레이프(Leifur)’라는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의 풀네임은 ‘레이프 에이릭손(Leifur Eiríksson)’, 즉 ‘에이릭의 아들 레이프’가 된다. 만약 딸을 낳아 이름을 ‘헬가(Helga)’라고 짓는다면 ‘헬가 에이릭스도티르(Helga Eiríksdóttir)’, 즉 ‘에이릭의 딸 헬가’가 되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 때문에 한 가족이라도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의 성이 모두 다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들이기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딸이기에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리고 자녀들은 다시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름을 따르기 때문이다. 서구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스터 스미스(Mr. Smith)’ 가족 같은 개념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성 평등 의식이 고취되면서 어머니의 이름을 따르는 모계명 사용도 늘어나는 추세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불명확하거나, 미혼모 가정이거나, 혹은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어머니의 이름을 성으로 삼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부모 중 누구의 이름을 따르든, 그 이름이 곧장 ‘나의 뿌리’를 증명한다는 점이다.
‘돈이 곧 면죄부’는 없다, 억만장자도 예외 없는 핀란드의 도로, 소득에 비례하여 부과하는 교통 범칙금제도가 있다
족보의 디지털화, ‘친척 확인 앱’의 등장
성이 없다 보니 생기는 재미있는 사회 현상도 있다. 바로 족보에 대한 남다른 집착이다. 성씨가 대대로 내려오지 않고 매 세대마다 이름이 바뀌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친척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하면 가까운 친척인 줄 모르고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인구 37만의 작은 섬나라에서는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슬란드인들은 ‘이슬렌딩가보크(Íslendingabók)’, 즉 ‘아이슬란드인의 책’이라는 방대한 온라인 족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1,200년 전 바이킹 정착 시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인구 데이터를 디지털화해 연결한 것이다. 심지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데이트 상대를 만났을 때 스마트폰을 서로 맞대어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이슬렌딩가앱(ÍslendingaApp)’이 필수품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잠깐, 우리 사촌 아니지?”라는 질문이 농담이 아닌 필수 확인 절차가 된 것이다.

엄격한 이름 위원회와 정체성의 보존
아이슬란드 정부는 이러한 고유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이름 위원회(Mannanafnanefnd)’를 운영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짓고 싶은 이름이 아이슬란드어 문법에 맞는지, 성별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아이가 자라면서 놀림감이 되지는 않을지를 엄격하게 심사한다. 아이슬란드 알파벳에 없는 ‘C’나 ‘Z’가 들어가는 이름은 거부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카밀라(Camilla)’는 거절당하지만, ‘K’를 쓴 ‘Kamilla’는 허용되는 식이다.
이러한 규제는 때로 “부모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아이슬란드인은 이를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는 중요한 방어벽으로 인식한다. 성씨가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개개인의 이름을 더 중요하게 만든다. 전화번호부가 이름(First Name) 순서로 정렬되고, 대통령이나 총리를 부를 때도 직함 없이 이름만 부르는 수평적인 문화는 바로 여기서 기인했다.
결국 아이슬란드의 작명법은 “나는 누구의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인격체이자 동시에 누군가의 자녀”라는 선언과도 같다. 결혼해도 성을 바꾸지 않는 여성들,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름을 등 뒤에 달고 살아가는 자녀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끈끈하게 연결되어 온 이들의 방식은, 혈연을 중시하면서도 개인을 존중하는 가장 오래된 지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이름 뒤의 ‘손(-sson)’과 ‘도티르(-dóttir)’에는 천 년을 이어온 그들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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