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복제와 변형 속에서 재발견된 오리지널리티: AI시대의 역설이 낳은 ‘기원 찾는 근본이즘’
AI가 손쉽게 모든 것을 생성하고 모방할 수 있는 시대, 역설적으로 대중은 첨단 기술이 줄 수 없는 ‘진짜’의 가치를 찾아 근본으로 회귀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원조 맛집을 찾아 발품을 팔거나, 낡은 건물의 본점을 방문하고, 복각 제품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소비자가 급증했다. 최초의 원형과 진본을 존중하고 그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적 태도는 이제 단순한 복고 취향을 넘어 하나의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를 ‘근본이즘(Fundamentalism)’으로 정의하고 있다. 진짜에 대한 갈망이 소비 전반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모조품 시대, 기원에 경의를 표하는 MZ세대
근본이즘은 레트로가 과거의 감성을 빌려와 향수를 자극하는 것과 명확히 구별된다. 근본이즘은 ‘이것이 시작이었다’는 기원에 대한 경의이자, 모든 것의 뿌리를 인정하는 태도이다. 특히 생성형 AI의 대중화와 SNS를 통한 정보 홍수가 맞물리면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무수한 복제물 속에서 ‘오리지널’이 갖는 희소성과 검증된 가치가 재발견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근본이즘 트렌드를 주도하는 것이 정작 그 시절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MZ세대라는 사실이다. 1990년대생이 1970년대의 LP판에 열광하고, 2000년대생이 필름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이들은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꼼꼼히 따지고 창업 연도와 본점 위치를 확인하며, 근본 있는 것에 대해서는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러한 소비 패턴은 효율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깊이’를 되찾으려는 젊은 세대의 역설적 시도로 풀이된다. 모든 것이 쉽고 빠르게 손에 들어오는 시대에, 그들은 직접 발품을 팔고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경험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배달 앱 대신 직접 찾아간 원조 맛집의 음식 사진을 SNS에 자랑스레 올리는 행위는, 단순한 식도락을 넘어 ‘노력으로 쟁취한 진정성’을 과시하는 문화적 태도임이 드러난다.
본질을 지키되 시대를 담아내는 기업의 재해석
근본이즘 열풍은 기업들의 제품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단순히 옛 디자인을 베끼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본질적 가치는 보존하되 현대 기술을 접목하여 재해석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LG전자는 지난해 상반기, 1959년 금성사 시절 출시했던 국내 최초의 라디오 ‘A-501’을 66년 만에 복각했다. 이는 한국 가전 산업의 시작을 알린 상징적 제품이다.
LG전자는 원목 캐비닛의 질감, 둥근 다이얼, 황금빛 금속 그릴 등 A-501의 외형적 디테일을 완벽히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 동시에 내부는 현대식 블루투스 스피커 기능을 탑재하고 스마트폰 연결을 가능하게 하여, 60대 이상에게는 청춘의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아날로그 감성을 선사하는 새로운 제품으로 탄생시켰다. 이러한 재해석 전략 덕분에 A-501 복각 제품은 출시되자마자 순식간에 완판됐다.
물건뿐만 아니라 공간에서도 근본이즘의 가치는 빛을 발하고 있다. 1938년 문을 연 전주 금성당 시계방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오랜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건물의 구조적 원형은 보존하되, 카페, 독립 서점, 전시 공간을 더해 현대적인 쓰임새를 부여했다. 사람들은 단순한 옛 건물이 아니라, 한 세기 가까이 시간을 새겨 온 역사와 진정성에 매력을 느끼고 기꺼이 이 장소를 찾는다. 근본이즘은 추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진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점이 확인됐다.

인간다움의 영역을 구축하는 미래 설계
2026년은 AI와 인간의 공존이 본격화되는 한 해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생성형 AI가 광범위하게 일상화되면서, 오히려 기계가 완벽히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손길, 시간의 흔적, 그리고 불완전함이 갖는 아름다움이 더욱 특별한 가치를 갖게 될 것으로 풀이된다. 기업들은 무조건적인 자동화와 효율만을 추구하기보다, ‘이것만은 기계에 맡길 수 없는’ 인간적 특성을 갖는 영역을 분명히 구축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견고한 뿌리 위에서만이 과감한 혁신이 가능하다. 근본이즘은 과거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검증된 본질적 가치를 주춧돌 삼아 미래를 설계하는 지혜를 제공한다. 개인에게든 조직에게든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할지라도 지켜야 할 핵심 가치(근본)와 시대에 맞게 과감히 바꿔야 할 요소(재해석)를 구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결국 근본이즘 소비는 가장 인간적인 특성에 다시금 주목하고, 기원과 진정성을 찾는 문화적 태도임이 드러났다. 미래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과거의 단순 복제가 아니라, 본질을 지키는 단단한 근육과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과제가 제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