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필수의료, 무분별한 형사 고소와 고액 배상이 부른 의료 붕괴…정책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
대한민국의 필수의료 현장이 사법 리스크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무너져 내리고 있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할 의료진이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으며 수사기관과 법정을 전전하는 사이,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지키던 의사들은 하나둘 현장을 떠나고 있다.
18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의료 민·형사 소송 현황 비교분석 및 개선방안 모색을 위한 공청회’에서는 한국 의료계가 직면한 가혹한 법적 현실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이날 공청회는 더불어민주당 박균택 의원과 대한의사협회가 공동 주최하고 보건복지부가 후원해, 위기에 빠진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통계 수치는 가히 충격적이다. 최근 5년간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입건된 의사는 연평균 약 735명에 달한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으로, 매년 수백 명의 의료진이 형사 피의자가 되어 고통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민사 소송 역시 2020년 이후 매년 700~900건이 제기되고 있으며, 환자 측의 청구가 인용되는 비율은 절반을 넘는 약 50% 내외로 조사됐다.
박균택 의원은 개회사를 통해 “의료사고 문제는 국민의 생명권 보호와 의료체계의 신뢰가 직결된 사안”이라며, “법적 부담의 증가는 필수의료 현장의 위축을 초래하고 결국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의료계 역시 “선의를 다한 진료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항력적인 결과에 대해서까지 가혹한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 많은 동료가 좌절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규제의 트릴레마’에 빠진 한국 의료… 개인 책임을 공동체로 전환해야
주제 발표자로 나선 서종희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의 위기를 ‘규제의 트릴레마(Regulatory Trilemma)’라는 개념으로 분석했다. 이는 ▲의료인에 대한 강한 법적 책임 부과 ▲낮은 의료수가 유지 ▲필수의료 공급 유지라는 세 가지 목표가 동시에 달성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가격(수가)을 공적으로 통제하면서 위험(책임)을 사적으로 전가하면, 결국 시스템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서 교수는 특히 의료과오 형사소송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짚었다. 일례로 82세 고령 환자에게 장정결제를 투약한 후 발생한 대장 천공 사망 사건(일명 쿨프렙 사건)의 경우, 1심에서 의료진 모두에게 금고형이 선고됐으나 대법원과 파기환송심을 거치며 지도 전문의는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비록 무죄가 확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수년 동안 이어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의료진이 겪은 정신적 피해와 임상 현장의 위축 효과는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는 “필수의료 사고를 개인의 과실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고위험 의료행위가 가진 구조적 위험으로 인식해야 한다”며, 불법행위법의 공동체화를 제안했다. 즉, 의료 사고의 책임을 의사 개인에게만 지우는 현행 구조에서 벗어나, 국가나 공적 기금을 통한 ‘무과실 보상 제도’를 도입하고 사회 전체가 위험을 분담하는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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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 ‘기소제한 특례’ 도입으로 안전망 강화
정부와 국회도 필수의료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이 그 출발점이다. 이 개정안은 필수의료 행위 중 발생한 사고에 대해 일정한 요건을 갖출 경우 형사 기소를 제한하는 ‘기소제한 특례’를 골자로 한다.
기소 제한을 받기 위한 구체적인 요건으로는 ▲설명의무를 이행했을 것 ▲책임보험이나 공제에 가입했을 것 ▲중대한 과실이 없을 것 등이 제시됐다. 특히 보건복지부는 판례 분석을 통해 ‘중대한 과실’의 범위를 12개 유형으로 명확히 정리해 법적 예측 가능성을 높였다. 여기에는 동의 내용과 다른 수술, 수술실 내 이물질 잔존, 1회용 의료기구 재사용, 약제 투여 전 과민반응 조사 미실시 등이 포함됐다.
또한, 의료 사고 이후 의료진과 환자 사이의 소통을 장려하기 위한 ‘사과 보호’ 장치도 논의됐다. 사고 원인을 설명하거나 유감을 표명한 내용이 향후 민·형사 재판에서 과실을 인정하는 증거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보호함으로써, 불필요한 분쟁을 막고 상호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취지다. 전문적인 판단을 돕기 위해 ‘의료사고심의위원회’를 설치해 중과실 여부와 필수의료 해당 여부를 신속히 가려내는 방안도 추진된다.

뉴질랜드와 일본의 사례가 주는 교훈, “국가적 책임 강화가 해법”
해외 선진국들은 이미 의료 사고의 사법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강력한 공적 보상 체계를 운용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세계 유일의 무과실 손해배상 제도인 ACC(Accident Compensation Corporation)를 통해 의사의 과실 유무와 관계없이 국가 기금으로 환자에게 보상을 제공한다. 이 제도가 적용되는 경우 환자는 민사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제한되며, 형사 처벌 사례 또한 극히 드물어 의료진이 진료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일본 또한 2004년 ‘후쿠시마 오오노병원 사건’에서 산모 사망 후 의사가 체포·구속된 일을 계기로 사회적 인식의 대전환을 맞았다. 과도한 형사 개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일본은 ‘산과의료보상제도’와 ‘의료사고조사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소송 대신 화해로 종결되는 비율이 높아졌으며, 의료 사고 소송 건수도 2004년 정점을 찍은 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2023년에는 약 610건 수준으로 떨어졌다.
독일의 경우도 형사 책임 적용에 매우 신중하다. 의사의 의무 위반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가 확실에 가까울 정도로 명확한 경우에만 책임을 묻고 있으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라는 원칙을 철저히 적용한다.
결국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한 해답은 의료인을 처벌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고, 사고의 고통을 사회가 함께 나누는 데 있다. 이형훈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환자와 의료인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의료 환경을 만들기 위해 현장 의견을 적극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공청회를 통해 도출된 지혜들이 실제 입법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필수의료가 다시 숨 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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